'어떻게 여자가' 했던 어르신들 이젠 '똑순이' '야문애'라 불러줘
일ㆍ가정 함께 챙기기 어려웠죠…가정적 남편 덕에 여기까지 와
정재계 유리천장 깨는 데 보람…저출산 정책 깊이 들여다볼 것
더불어민주당 여성 정치인들 사이에서 든든한 ‘행동대장’을 자처하는 양향자 민주당 의원(광주 서을·53)이 19일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에서 진행한 이투데이와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21대 국회 여성 의원은 총 57명(지역구 29명·비례대표 28명), 전체의 19%로, 역대 국회 중 최다 인원을 기록했다. 그러나 여성 의원이 소수 약자에서 벗어나 의정 활동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유의미한 모수인 ‘30%’에 미치지 못하는 아쉬운 성적표다. 이 가운데 민주당 내에서 서울, 경기를 제외한 강원·충청·호남·영남·제주 등 지역 유일의 여성 당선인이 바로 양향자 의원이다.
그는 “(이 타이틀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만큼 지역으로 갈수록 여성 정치인이 정치 영역에 진입하는 게 힘들다는 것”이라며 “여성이 정치를 한다는 점에 대해 유권자의 인식이 아직까지 보수적이고 부정적”이라고 토로했다. 양 의원은 “4년 전 처음 광주에 출마하려고 내려갔더니 70대, 80대 어르신들이 ‘젊은 여자가 어떻게 정치를 하나’라고 항상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는 “4년 동안 열심히 하는 과정을 지켜보신 뒤에야 비로소 ‘똑순이’, 전라도 말로 ‘야문이’, ‘야문애’라고 불러주셨다”며 웃어 보였다.
21대 총선에서 6선의 천정배 전 의원과 리턴매치해 75.8%란 압도적인 득표율로 금배지를 거머쥔 양향자 의원이다. 그는 20대 총선을 앞두고 당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의 삼고초려 영입으로 처음 정치에 발 디뎠다. 총선 패배 후 곧바로 2016년 당시 여성부문 최고위원에 도전했다. 그는 예상을 깨고 현역인 유은혜 의원을 꺾어 원외 신분임에도 당 최고위원으로 활약했다. 당 전국여성위원회 위원장 또한 맡으면서 여성 정치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그는 “전국의 여성 풀뿌리 정치인을 만나보니 꿈나무가 많더라”라면서도 “이들이 길을 찾지 못하고 싹부터 잘려나가는 모습을 봤다. 제가 해야 할 것이 많다고 느낀다”고 했다. 그는 “제가 전국여성위원장과 최고위원에 당선됐을 때 저를 도와주셨던 분들, 그때 구축했던 네트워크가 여전히 살아있다”며 “여성들과 함께 만든 정치 지형이며, 함께 만든 선거다. 여성들은 지금도 끈끈하게 정치 영역에서 계시고, 지방의원으로도 많이 당선됐다. 다만, 국회의원 당선이 어려운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양 의원은 지난 4년간 자신의 압축성장을 토대로 여성 정치에 대한 책임감을 드러냈다. 그는 “4년 전에는 유권자분들에게 아무리 제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며 믿음을 주시라고 말씀을 드려도 기본적으로 여성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깨긴 어려웠다. 결국 유리천장을 깬 일에 보람을 느낀다”며 “제 또 하나의 소명은 지역과 수도권을 구분하지 않고 여성들이 정치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양 의원은 여성들이 정치에 진입할 때 할당이나 배려받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도 자신은 해당 사항이 돼선 안 된다고 누차 말했다. 나아가 “여성을 할당하기 전에 여성 인재를 발굴하고 제대로 길을 열어주는 역할 또한 중요하다”며 “여성이 정치하기 힘들다. ‘여성이 제대로 된 정치를 하겠나’란 인식을 깨야 한다”고 했다.
양 의원은 “60년 민주당 역사상 구청장 하나 못 낸 광주가 경선을 거쳐 본선에서도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당선이 된 제 과정을 보시면서 호남분들의 인식도 완전히 바뀌셨다. 그 지난 과정이 힘들고 고통스러웠다”고 돌이켰다.
그는 “삼성전자 메모리설계실에 기술 보조가 아닌 연구원 사무 보조원으로 입사했다. 커피 심부름과 복사 업무를 도맡았었다. 기술자들 사이에서 투명인간이 된 느낌이었다. 기술을 모르면 영원히 부속품으로 살게 될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운 좋게도 광주여상 3학년 2학기 때 일본어를 배운 것을 살려 복사하던 기술 페이퍼에 일본어 번역을 넣기 시작했다”고 했다. 비로소 ‘미스 양’에서 ‘양향자 씨’로 불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이를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는 그는 30년을 삼성전자에 굵게 뿌리내렸다. 사내어린이집 도입을 지속적으로 건의해 후배들이 복지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왔다는 양 의원이다. 그는 “과거에는 ‘아이 낳는 여성이 거친 설계 분야에 근무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회사가 단정적으로 말할 정도였다. 이러한 일반적인 인식이 제가 들어간 뒤에 점차 바뀌었다”고 했다. 그는 “여성 후배들이 겪는 어려움을 누구보다 제가 잘 알았고 함께 고민했다. 정치에 입문하느라 회사를 그만둘 때 여성 동료들이 제일 안타까워했다”고 떠올렸다.
그는 “(여성이 커리어와 가정을 함께 꾸려가는 것에 대한) 어려움은 저 또한 다 똑같이 겪었다. 정말 다른 두 사람의 결혼이다. 내 부모도 소통이 잘 안 되는데 배우자 부모와 관계는 어떻겠나”라고 입을 열었다. 그는 “저는 17년을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올해가 결혼 30주년인데 매일 시어머님께 전화 드리겠다는 신혼 초 약속을 여전히 지키고 있다. 가장 효율적이고 생산적이고 경제적인 방법”이라며 “하루 이틀이 아니라 몇 십 년 동안 지속되니까 남편도 존경심을 표하고, 시부모님 또한 며느리가 일하는 것에 대해 지지해주신다”고 귀띔했다.
정치권의 영입 제의가 왔을 때 양 의원의 배우자 역시 당황스러움을 느끼고 처음에는 극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양향자 의원이 오늘의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건 남편의 든든한 외조가 있었음을 고백한다. 삼성전자 ‘사내커플’이었던 양 의원은 “남편이 선생님 역할을 많이 해줬다. 처음엔 (반도체에 대해) 남편이 많이 아는 상황이었다. 집에서도 메모리 반도체 공정이 어떻게 되나 서로 얘기 나눴다. 남편과의 협업이 제 성장에도 크게 영향을 줬다. 결국 고졸 출신인 제가 남편보다 먼저 임원이 됐다”고 미소 띠었다. 남편에 대해 “남편과 저는 역할이 바뀌었다고 할 정도로, 남편은 가정적이다. 서로 보완하는 삶을 살았기에 일과 가정, 학업이 균형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힘든 일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어느 것 하나 아픔으로 남겨두지 않겠다고 다짐한다”고 했다.
21대 국회에선 헌정 사상 첫 여성 부의장에 김상희 의원이 올라 여성 정치사에 획을 그었다.
그는 “저는 한국여성의정 이사로서 의장단에 여성을 진입시키는 게 첫 역할이었고, 이는 성공했다. 이전에도 여성 의원들의 실패가 있었는데, 자꾸 실패하게 되면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인식과 한계가 만들어진다. 더욱이 여성이 의장단에 진입하는 역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국민은 역사를 만드는 데 함께하면 자랑스러워하신다. 훌륭한 다선 남성 의원들이 계셨으나, 그분들 또한 접으신 이유가 큰 역사에 역할을 하시겠다는 뜻이었다”고 했다.
“유리천장을 깨는 게 소명”이라는 양향자 의원은 여성 리더로서 코로나19 등 격변하는 위기에 놓인 여성들의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 또한 드러냈다.
그는 “취약계층 가운데에서도 여성은 상대적으로 훨씬 더 취약계층으로 분류되고 있다. 개인이 돌파하기엔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4차 산업혁명 시대 속 패러다임이 바뀌는 가운데 여성들이 ‘경단’(경력단절)을 겪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 정책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 “젊은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 육아를 기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실이다. 저출산 정책에 대해서도 깊이 들여다봐야 할 것”이라고 고민을 드러냈다.
◇약력
△1967년 전남 화순 출생 △1986년 광주여상 졸업 △1985년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보조연구원 입사 △1993년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SRAM램설계팀 책임연구원 △2005년 한국디지털대학교 인문학 학사 △2007년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DRAM램설계팀 수석연구원 △2008년 성균관대 전자전기컴퓨터공학과 공학석사 △2014년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플래시설계팀 상무 △2016년 더불어민주당 입당 △2016년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전국여성위원장 △2017년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선거 광주선거대책본부장 △2018년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원장(차관급) △2020년 21대 국회의원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