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구나 공화국의 공직에 있는 자가 군주를 입에 올렸으니 나라의 주인을 함부로 바꾸는 모반에 다름 아니다. 마땅히 대역죄로 다스려 주리를 틀고 삼족을 멸해야 하나, 차마 속뜻은 그러하지 않을 테니 주인의 너그러움을 베풀기로 한다.
우리도 성공한 대통령을 가질 때가 됐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한다. 퇴임 후 법정이 아니라 강연장 같은 곳에 선 전직 대통령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멋들어진다. 다만, 세종인지 연산군인지는 문 대통령을 보필하는 사람들이 평가할 일이 아니다. 평가가 아니라 바람을 말했을 뿐이라 해도 번지수가 잘못됐다. 문 대통령이 세종처럼 되길 바란다면 참모들은 스스로 황희가 되고 정갑손이 될 생각부터 해야 맞지 않을까.
황희와 견줄 인물이라 자신하는가. 도승지와 육조판서를 모조리 거치고 우의정과 영의정까지 섭렵한 그는 무려 73년간 왕을 보필하다 현직 영의정부사로 순직했다. 69세이던 세종 13년 처음 사직을 청했던 그는 20년 동안 9차례나 물러나게 해달라 애원했으나 세상과 작별하고서야 세종을 떠날 수 있었다. 청와대 찍고 자기정치하겠다며 우르르 떠나간 철새들이 세종을 입에 올리면 ‘세종 1호 노예’ 황희가 떠오르는 이유다.
정갑손은 대중적 인지도나 벼슬의 높고 낮음에서는 황희에게 밀릴지 몰라도 ‘살아서는 염근리, 죽어서는 청백리’의 표본으로 꼽히는 세종의 측근이다. 정무수석이나 검찰총장쯤 되는 대사헌을 지낸 그는 정승·판서들이 비리를 저지르면 서슴없이 “국문하소서”를 외쳐 세종 등에 땀깨나 흐르게 했던 인물이다. 세종조차 까칠한 그가 부담스러웠던지 함길도 관찰사로 내친 적이 있다. 어느 날 정갑손은 세종의 부름을 받고 한양에 갔다 돌아오던 길에 함길도 향시 급제자 명단에 아들 이름이 있는 것을 보게 됐다. 향시는 지방에서 치르던 과거시험으로, 이 시험에 합격해야 한양의 복시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정갑손은 기뻐했을까. 그는 “아들의 학문이 부족함을 내 이미 알거늘 어찌 요행으로 임금을 속인단 말이냐”며 크게 화를 낸 뒤 손수 급제자 명단에서 자식 이름을 지워버렸다. 그럼 정갑손의 아들 정오는 정말로 깜이 안 되는 인물이었을까. 정오는 군말 없이 경상도로 내려가 다시 향시에 응했고 장원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듬해 대과에 급제해 당당히 금의환향했다. 역시 범의 새끼가 고양이일 리는 없는 모양인데, 부모의 인맥과 권력을 총동원해 자식을 범으로 만들어보려다 탈이 난 청와대 고양이가 생각나는 건 분명 기분 탓일 게다.
‘중국 속국’ 논란이 일 때 누가 좀 보고 배웠으면 하는 신하도 세종에게는 있었다.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면서 “나의 주춧돌 같은 사람”이라 특별히 천거했던 문경공 허조는 세종에게 “아니 되옵니다”를 가장 많이 외쳤던 예조판서다. 고려 우왕부터 조선의 세종까지 두 왕조에 걸쳐 6대의 임금을 섬긴 인물이다. “의심이 있으면 맡기지 말고,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라”는 말도 사실은 세종이 아니라 허조의 인사 원칙이다.
사극이나 영화에서와 달리 아쉽게도 현실의 세종은 ‘신하의 나라’를 자청하며 중국을 받드는 사대가 지나쳐 되레 신료들과 마찰이 잦았다. 허조는 그런 세종에게 수시로 태클을 걸었다. 어느 날, 군마 1만 필을 보내라는 명나라 영락제의 요구를 세종이 들어주려 하자 그는 “백성의 피고름이 터지고 조선의 안위가 흔들리는 일”이라며 목을 내놓고 반대했다. 영락제가 죽은 뒤 조선 출신 후궁 한 씨를 순장하자 “허수아비도 순장하면 대가 끊긴다는 것을 아는데 대국의 이런 것은 배울 바가 못 된다”며 팩폭을 날려 미움을 사기도 했다.
‘중국 마스크 셔틀’과 ‘300만 달러 조공’ 논란이 한창일 때 아니되옵니다를 외친 문 대통령 측근이 있다는 이야기는 아직 못 들어봤다. 문 대통령이 세종 웨이를 걷길 바라는 각료와 참모들이 기억해 줬으면 하는 것은 세종은 간신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느 시대, 어느 왕에게나 있던 요망한 세 치 혀가 유독 세종대의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 성군과 태평성대를 원한다면, 그 방정맞은 입부터 서둘러 다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