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어디갈래] 서예, 한국 현대미술 史 한 획을 긋다

입력 2020-05-07 06:00 수정 2020-05-0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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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첫 서예 전시…서예 발자취 한눈에

▲김환기, 항아리와 시, 1954, 캔버스에 유채, 80.9×115.7cm, 개인소장, 환기재단 환기미술관. (사진제공=이하 국립현대미술관)
▲김환기, 항아리와 시, 1954, 캔버스에 유채, 80.9×115.7cm, 개인소장, 환기재단 환기미술관. (사진제공=이하 국립현대미술관)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는 동양의 보편적 예술관이다. 시서화(詩書畵)는 시를 쓸 때나 그림을 그릴 때나 공통으로 적용되는 것이 '서'요, 이는 곧 '화'임을 뜻한다.

일본화풍의 청산과 새로운 민족미술을 수립하려는 의지가 팽배하던 시기, 해방 이전 유행했던 면(面)적이고 섬세한 채색화풍은 간결하고 필선의 리듬감을 살린 수묵 선묘(線描)로 대체된다. 점차 서예적 필선은 그림의 핵심 요소로 등장하며, 시가 그림과 결합되는 형식은 다시 유행하기 시작해 50년대 이후 수많은 시화전(詩畫展)이 열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해방 이후 화가들은 '글씨와 그림은 뿌리가 같다'는 '서화동원'(書畫同源)과 '시화일률'(詩畫一律)의 개념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계승한다. 소전 손재형은 "우리 미술문화를 바로잡고 서예문화를 새롭게 전개하자"며 '서예'라는 용어를 만들고, 중국의 '서법', 일본의 '서도'와 차별화를 꾀한다.

'미술관에 書(서): 한국 근현대 서예전'은 국립현대미술관이 1969년 개관한 이후 처음 마련한 서예기획전이다. '한국 현대서예가 1세대' '국전 1세대'로 불리는 12명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였다. 최근 주목을 받는 캘리그래피와 타이포그래피, 영상 캘리그래피 등으로 서예의 확장 가능성까지 엿본다.

김환기의 '항아리와 시'(1954)가 눈에 띈다. 작품은 그림일기라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문화를 빌린다. 한국 현대미술의 선구자인 그는 터무니없는 것을 표현하기보다 소재, 표현의 추상화에 집중했다. 문인화의 시서화 일치 사상을 '수묵'이 아닌 '유채'를 통해 표현했고, 제발을 한글로 씀으로써 문인화를 현대적으로 변모시키려 했다. 기하학적 도형 위로 하얀 매화가 만개하는데, 서정주의 시가 어우러져 화면에 운치를 더한다.

황창배의 '무제'는 또 다르다. 화면의 절반에 적힌 금빛 숫자들은 낙서처럼 보이지만 작가의 의도성이 다분한 획들이다. 전시를 기획한 배원정 학예연구사는 "황창배는 시도에 주저함이 없었던 작가"라며 "자기 부정과 자기 해체 등을 통해 시서화 해체를 계승한다"고 설명했다.

▲서세옥, 사람들, 1988, 종이에 먹, 187x18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서세옥, 사람들, 1988, 종이에 먹, 187x18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응노와 남관은 1960년대 이후 서체를 추상회화의 요소로 활용하는 서양 제작 방식을 수용해 '문자추상'을 완성했다. 특히 이응노는 먹으로 그릴 때뿐만 아니라 콜라주로 문자추상을 제작할 때도 서예를 쓰듯 리듬감을 살렸다. '주역' 64괘 문자의 획이 인간의 형상으로 되살아난다.

김기창의 '문자도'(1980)는 진한 먹으로 예서필의 두툼한 획들이 화면 오른쪽에 짜임새 있게 구성됐다. '물방울의 화가'로 알려진 김창열은 1980년대에 이르러 글자에서 해체된 필획과 물방울을 함께 등장시켰다.

오수환은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어릴 적 서예를 배워 그의 많은 작품에서 서예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가로획과 세로획, 그 사이를 오가는 사선들의 무절제함은 그림의 역동성을 불러일으킨다. 김종영은 추사 김정희 글씨 구조의 아름다움을 기하학적 입방체로 조각한다.

▲검여_ 유희강, 나무아미타불 완당정게阮堂靜偈, 1965, 종이에 먹, 64×43cm,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소장.
▲검여_ 유희강, 나무아미타불 완당정게阮堂靜偈, 1965, 종이에 먹, 64×43cm,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소장.

2층 두 번째 전시장의 부제는 '글씨가 그 사람이다'다. '국전 1세대' 대표작가 12명의 연결고리를 찾아봐도 좋다. 소전 손재형은 해방 이후 '서예'라는 명칭을 정착시키고 자신만의 한글 서체인 '소전체'를 개발했다. 그는 추사의 걸작 '세한도'를 일본인에게서 인도받아 귀국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여초 김응현은 소전체를 비판하며 1775자의 광개토태왕비문의 글씨를 5m 높이로 써냈지만, 여초의 형인 일중 김충현은 소전과 제1회 국전을 기획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서체의 역사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중국인들은 김충현의 서체를 보며 '시각의 안정성'이 있다고 극찬했다고 한다.

같은 층의 검여 유희강의 '두보시 백보행'은 배 학예연구사가 꼽은 작품이다. 배 학예연구사는 '묵향'이 난다고 표현했다. 4시간 동안 먹을 갈고 하루 숙성시킨 후 글을 썼기에 빛깔이 남다르다. 그는 58세에 오른손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왼손 필법을 연구해 '우수서' 못지않은 '좌수서'를 완성했다. 예술가적 인간승리를 느낀다.

▲소전 손재형,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탁본, 1956, 370×115×(2)cm, 370×57×(2)cm, 동성갤러리 소장.
▲소전 손재형,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탁본, 1956, 370×115×(2)cm, 370×57×(2)cm, 동성갤러리 소장.

12인 중 유일한 여성 서예가인 갈물 이철경, 소전의 제자이지만 소전체를 흉내 냈다고 비판을 바다 평보체를 만든 평보 서희환도 만난다.

세 번째 전시장은 '전통의 계승과 재해석' '서예의 창신과 파격' '한글서예의 예술화'라는 세 가지 기준에 따라 전문가 15인이 선정한 '2세대 서예가'들의 작품을 모아놓았다. 하나의 대상을 얼마나 확대했는지, 화면 밖으로 치고 나가는 정도가 어떠한지 하석 박원규, 포헌 황석봉 등을 통해 확인한다.

4부는 서예의 디자인 가능성을 발견하는 자리다. 서예와 '캘리그래피'의 연결고리가 있다. 음가를 해체한 강병인의 서체에선 한글의 표정이 보인다. 한글은 읽는 것이 아닌 보는 것이라는 이상현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재료로 활용했다.

▲안상수, 문자도, 2019, 캔버스에 실크프린트, 300×120cm, 개인소장.
▲안상수, 문자도, 2019, 캔버스에 실크프린트, 300×120cm, 개인소장.

배 학예연구사는 "김환기의 작품은 고가인데, 서예가의 작품은 몇십만 원이다"라며 "국전 세대를 넘어서서 지금의 캘리그라피와 타이포그래피가 있기까지 흔적을 보면서 서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길 바란다"고 했다.

한편 이번 전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온라인 개막했다. 지난 3월 30일 유튜브에 공개된 영상은 6일 오전 기준 6만3959회 시청됐다. 국현의 온라인 영상 중 가장 많은 조회 수를 기록했다. 7월까지 국현 덕수궁관에서 열지만, 국현은 안전 관람을 위해 온라인 예약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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