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는 올 1분기 연구개발비로 5조3600억 원을 썼다. 이 기간 매출 59조8848억 원의 9.68%를 차지하는 규모다. 분기 기준으로 역대 최대 연구개발비와 매출 대비 비중이다. 삼성전자는 작년에 20조 원을 연구개발비로 썼다. 이는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과 거의 같은 수준이다. 올해 정부는 24조 원을 연구개발비로 책정했다. 삼성전자가 작년 수준인 20조 원을 넘을 게 확실하고 삼성SDI, 삼성전기 등 관계사를 합치면 역시 정부와 삼성전자의 올해 연구개발비 규모는 비슷해질 것으로 보인다.
정부와 삼성전자는 사실상 오래전부터 연구개발 전략에서 2인3각으로 뛰어 왔다. 이를 상징하는 게 연구개발비다. 2001년 5조 원에 달했던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은 2008년 10조 원을 넘어선 뒤 2019년 20조 원을 기록했다. 5조 원에서 10조 원으로, 10조 원에서 20조 원으로 각각 배증하는 데 7년, 11년이 결렸다. 이에 비해 2007년 5조 원에 달했던 삼성전자의 연구개발비는 2011년 10조 원을 달성한 뒤 2019년에 20조 원을 기록했다. 삼성전자의 배증 기록에는 각각 4년, 8년 걸린 셈이다.
지난 20년간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은 꾸준히 늘었으나 그 증가율은 2000년대의 10% 전후에서 2010년대 들어 떨어지기 시작해 1%대까지 내려갔다. 정부 예산에서 차지하는 연구개발 예산 비중은 5%를 약간 밑도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삼성전자의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비 비중은 2010년대 전반부 7% 전후를 유지했으나 2010년대 후반 들어 상승세를 보이기 시작해 올 1분기에는 9.7%까지 높아졌다.
이 같은 정부와 삼성전자의 연구개발 커플링 현상은 2016년부터 일기 시작한 제4차 산업혁명, 2019년 일본발 소재·부품·장비 위기 등에 정부와 기업(삼성)이 공동 대응하는 환경에서 본격화된 것으로 풀이된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는 이러한 커플링을 한층 더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의 주목을 받는 삼성전자의 1분기 획기적인 연구개발비 투자는 이를 상징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인한 경기 침체로 세계 기업들의 경영 실적이 급속히 악화하고 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 신문이 운영하는 기업 재무 데이터인 ‘퀵 팩트세트’에 따르면 세계 주요기업의 2020년 1분기(1~3월) 연결순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40% 급감했다. 2008년 9월 리먼 쇼크 이래 최악의 감소 비율이다. 일본과 유럽이 70~80%의 최고 감소 비율을 나타냈다. 항공업계의 경우 전체 회사가 적자로 전환했고, 자동차 업계의 실적 악화도 두드러졌다. 세계 전체로 2분기(4~6월)에도 약 40%의 이익 감소를 기록할 것이라는 전망이 시장에서 나오고 있다. 주요 기업들은 현금 확보에 주력하는 동시에 주주 배당을 줄이거나 미루며 위기에 대응하고 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선방하면서 연구개발 투자를 확대하는 것은 괄목할 만한 일이다.
세계가 감염 방지와 경제대책의 양립에 고전하고 있는 가운데 한숨을 돌려 경제 대책에 매진할 수 있게 된 우리 정부와 기업에겐 좋은 기회다. 문재인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현장을 돌면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힘은 끊임없는 도전과 혁신에서 나온다”고 강조하면서 ‘포스트 코로나 위기’ 대응을 선도하는 모습도 경제를 침식하는 ‘불확실성’을 줄여주고 있다.
삼성전자는 2018년부터 AI(인공지능), 5G(5세대 이동통신), 바이오, 반도체 중심의 자동차 전장 부품을 4대 차세대 성장사업으로 선정해 집중 투자하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최근 삼성종합기술원을 찾아 차세대 AI 반도체 및 소프트웨어 알고리즘, 양자 컴퓨팅, 미래 보안기술, 혁신소재 등 차세대 미래기술 전략을 점검한 것은 경쟁업체를 완전히 따돌리기 위한 초격차 전략의 일단을 내비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재용 부회장 체제의 삼성전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 따른 세계적인 불황에 맞서 미래를 위한 승부수를 던졌다. 정부와 보조를 맞춘 이 승부수가 한국경제를 구하고 미래를 담보하는 견인차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