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그램 n번방,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람들

입력 2020-03-26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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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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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으로 돈을 벌려고 한 여자도 죄 있는 거 아니냐?"

"텔레그램 n번방은 보기만 해도 처벌한다고? 남자 몸캠 돌려본 사람들은?"

비난은 국어사전에 '남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서 나쁘게 말함'이라는 뜻으로 등재돼 있다. 이번 '텔레그램 n번방' 사건에서 조주빈은 물론이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 관련 글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피해자가 일정 부분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

이들의 논리는 간단하지만, 날이 서 있다. 피해 여성들이 돈 벌기 위해 영상을 찍었다가 약점 잡힌 게 아니냐면서, 한 남성이 몸캠을 찍다가 영상 유출 협박을 당한 것은 왜 이렇게 크게 다루지 않았냐라고 주장한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이런 주장이 담긴 글은 한 커뮤니티의 '베스트' 게시판에 올라가기도 했다.

언듯 그럴 듯이 보이는 내용이지만, 사건과 피해자, 사태의 전개 양상을 뜯어보면 큰 차이가 있다. 그 안에는 숱한 거짓과 회유가 있고, 협박과 폭력이 있으며 조롱과 멸시가 있었다. 그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 전대미문의 사건에 온 사회가 발칵 뒤집히고, 텔레그램 n번방의 운영자인 조주빈과 갓갓, 와치맨에 공분하는 이유다.

#1 피해자

두 명의 피해자가 있다. 한 명은 '몸캠 피싱'을 당한 남성. 몸캠 피싱은 여성을 가장해 남성에게 접근한 뒤 음란 화상채팅을 유도하고, 해당 장면을 촬영해 금품을 요구하는 행위다. 이 남성은 협박에 못 이겨 돈을 보내 금전적 피해를 보았을 뿐 아니라 신상정보가 알려질 것을 우려해 불안에 떨고 있다. 사실상 일상적인 사회생활이 힘들어진다.

또 다른 피해자인 한 여성은 '아르바이트'를 시켜준다는 말에 신상정보를 넘긴다. '고수익'이라는 단어에 현혹됐을 터. 급전이 필요한 상황이라 신상정보를 넘겼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정확한 확인을 위해 얼굴 사진을 요구하고 그 뒤엔 또 다른 신체 부위 사진을 찍으라고 한다. 응하지 않으면 신상정보와 사진을 뿌리겠다고 협박한다. 여성은 그렇게 '텔레그램'이라는 감옥에 갇힌다.

특정인으로부터 협박을 당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 모두 피해자다. 금품을 요구하거나 신상정보를 퍼뜨리겠다는 협박은 엄연한 범죄 행위다. 대부분 피해자는 이미 신체 부위가 노출된 데다, 자신이 드러내야 한다는 부담감 탓에 즉각 신고하지 않고 속앓이만 한다. 모든 성범죄가 그렇듯.

▲남성 몸캠을 못봤다며 동영상을 요구한 사람이 텔레그램 n번방 용의자에 관한 청와대 국민청원 동의를 독려했다. (출처=트위터 캡처)
▲남성 몸캠을 못봤다며 동영상을 요구한 사람이 텔레그램 n번방 용의자에 관한 청와대 국민청원 동의를 독려했다. (출처=트위터 캡처)

#2 반응

유사한 사건이지만 사법기관과 대중의 반응은 다르다. 몸캠 피싱 사건은 '안타까운 일'로 여겨진다. 가해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국민청원에 수 십만 명이 동의하지도 않는다. 가해자는 잊히고, 피해자만 주목된다. 대부분의 성범죄가 그렇듯. 일부에서는 피해 남성을 조롱하고, 유출 동영상을 찾는 트위터 글까지 올라온다.

텔레그램 n번방은 피해 사실이 알려지자 국민적 공분이 일어난다. 가해가 처벌은 당연지사. 경찰은 가해자를 검거했다. 텔레그램에 가입해 피해자가 나온 사진이나 영상을 본 사람도 신상을 공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경찰도 수사를 확대하겠다고 밝힌다.

물론 아직도 텔레그램에서 영상을 찾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반대 편에 섰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선 영상을 본 사람의 신상을 공개해야 한다는 글에 185만 명이 동의했다. 오마이뉴스 설문조사 결과, 찬성이 82%에 달했다.

같은 듯, 다른 이 두 사건의 온도 차는 뚜렷하다. 몸캠 피싱은 '연예'면에 다뤄질 만큼 가십거리에 그쳤지만, 텔레그램 n번방은 시사ㆍ사회에 이어 각 언론사 '기획'에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를 두고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유독 텔레그램 사태에만 엄격한 법 잣대를 들이대고, 피해자가 '여성'이라서 더 그렇다는 말이 나온다.

#3 차이

두 사건의 차이가 뭐길래 이토록 다른 반응이 나왔을까. 익명을 요청한 한 대학교의 여성학과 교수는 '성 착취'에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사건이 국민적 공분을 일으킨 요인도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 몸에 칼로 '박사'라는 글자를 새기고 남자 화장실에서 나체로 누워 영상을 찍도록 강요하는 건 인간의 존엄성을 없애는 일이지 않나요? 개처럼 짖으라고 하거나…. 텔레그램에서 이걸 공유하고 여성을 향해 '노예'라고 부르는 것 역시 요즘 사회에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성 노예로 삼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니까요. 심지어 피해 여성 주소까지 안다고 협박하면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었잖아요."

또한, 이 사건은 단순한 협박을 넘어섰다. 영상을 공유해 품평하고 심지어 칼에 찔려 피 흘리는 여성을 향해 "얼굴이 내 스타일이다", "흥분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범죄를 넘어 인권마저 짓밟은 것. 조주빈의 지시로 청소년을 성폭행한 남성이 경찰에 잡히기도 했을 정도로 인터넷에서 일어난 범죄가 현실 범죄로 이어졌다.

"특정 여성이 남성에게 성적 영상을 보냈다고 해서 그것을 타인과 공유하라고 동의한 것은 아닙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영상을 보내는 행위가 범죄도 아니고, 범죄의 원인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를 받아 남들에게 보내고, 협박해 또 금품이나 또 다른 영상을 요구하는 게 범죄죠. 성 착취에 가담해 기괴한 행위를 지시한 건 말할 것도 없고요."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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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피해자 유발론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피해자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돈을 위해 신상을 공개하고 영상을 보내지 않았냐는 것. 이는 '피해자 유발론'에 기인한다. 다른 범죄에 비해 특히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다움'이 요구됐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순결한 피해자'가 아니라는 식의 문화가 깔려있다는 뜻이다.

즉각 신고하기 어려운 성범죄의 특성을 고려하면 '피해자 유발론'은 사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비난 받을 게 두려운 피해자가 신고를 꺼리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성폭력 피해자가 재범의 희생양이 되는 일이 많다. 텔레그램 n번방 피해자 중에서도 이 이유로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보이스피싱이나 다단계, 사기도 기만과 협박을 통해 범죄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이 피해자를 비난하는 일은 드물잖아요. 이같이 모든 범죄에서 피해자가 원인을 제공한다고 욕하지는 않아요. 이런 식이면 형사사건이 성립되지도 않죠."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

전날 정의당은 텔레그램 n번방 관련 브리핑에서 "‘피해자 유발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서는 언론의 보도 방식을 문제 삼았다. 조혜민 정의당 여성본부장은 "문제의 원인을 잘못 두기 때문에 피해자 유발론으로 이어진다. 일부 언론에서 보도되는 방식에서 문제가 나타날 때가 있다"고 답했다. 따라서 피해자 보호에 우선 가치를 두고 2차 피해 확산하지 않도록 구체적인 범행 내용을 보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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