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방송, 서적, SNS 등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런데 이는 맞춤법에 맞지 않다. ‘빌어’ 대신 ‘빌려’라고 고쳐야 옳다.
많은 사람들이 ‘빌다’와 ‘빌리다’를 혼동하는 이유는 뭘까. 오늘날 ‘빌리다’의 정의가 예전에는 ‘빌다’에 해당했기 때문에 단어 정의 변화에서 오는 혼동일 수 있다. 원래 ‘빌다’는 임차(賃借)·차용(借用), ‘빌리다’는 임대(賃貸)·대여(貸與)의 의미로 구분되어 있었다. 즉, ‘빌다’는 ‘주인에게 돈 등을 갚기로 하고 얼마 동안 쓰다’는 뜻이었다. 반대로 ‘빌리다’는 ‘소유자가 돈 등을 나중에 돌려받기로 하고 상대방에게 얼마간 사용하게 하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이 같은 의미 구분이 인위적이고, 무엇보다 실제 언중은 차용의 뜻으로 ‘빌다’가 아니라 ‘빌리다’를 많이 사용하였다. 이러한 언어 현실을 반영해 1988년 한글맞춤법 개정 이후 ‘빌다’를 버리고, ‘빌리다’만 표준어로 취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빌다’가 원래 갖고 있던 차용 의미는 ‘빌리다’가, ‘빌리다’가 원래 갖고 있던 대여 의미는 ‘빌려주다’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빌려주다’는 ‘물건 등을 나중에 도로 돌려받거나 대가를 받기로 하고 얼마 동안 내어 주다’라는 뜻이다.
결국 ‘빌다’는 차용의 의미는 잃게 되었지만, 단어 자체가 비표준어는 아니다. ‘빌다’는 ‘바라는 바를 이루게 해 달라고 간청하다’ 또는 ‘남의 물건을 공짜로 달라고 호소하여 얻다’는 뜻이 있다. “소원을 빌었다” “집집마다 다니며 음식을 빌었다”와 같이 쓸 수 있다. 또, “부모님께 용서를 빌었다”처럼 ‘잘못을 용서하여 달라고 호소하다’는 의미도 있다.
첫머리에서 언급한 ‘이 자리를 빌어’에서 기본형 ‘빌다’는 앞선 설명처럼 예전에는 ‘빌리다’의 의미였으므로 언중이 헷갈릴 수 있다. 하지만 한글맞춤법 개정을 통해 그 의미는 사라졌으므로 ‘빌어’라고 하면 틀린다. ‘빌리다’는 차용의 의미뿐 아니라 ‘어떤 일을 하기 위해 기회를 이용하다’의 뜻도 있다. 따라서 ‘마침 마련된 기회를 이용해 하고자 하는 바를 밝히다’는 뜻으로 쓰고자 할 때에는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와 같이 써야 맞다.
‘빌다’와 ‘빌리다’의 쓰임이 헷갈린다면 ‘갚음의 여부’를 확인하면 된다. ‘빌다’는 공짜로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므로 갚을 필요가 없지만, ‘빌리다’는 남의 것을 되돌려주기로 약속하고 쓰는 것이므로 반드시 갚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