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의 시 ‘장자(莊子)를 빌려: 원통에서’의 마지막 구절이다. 시는 장자의 ‘추수편’에 실린 ‘대지관어원근(大知觀於遠近)’을 빌려 ‘큰 지혜는 멀리서도 볼 줄 알고, 가까이서도 볼 줄 아는 것’을 드러낸 작품이다. 지금 금융당국에 전하고 싶은 글귀다. 금융권의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하고 팔을 비틀어 일자리 창출 숫자 맞추기에 급급한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와서다.
첫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 6월 금융위원회는 “금융권의 일자리 창출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경제여건 변화에 따른 금융권의 일자리 창출 현황과 구조적 변화 추세 등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며 금융권 일자리 창출효과 측정 계획을 발표했다. 시중은행과 지방은행을 포함해 14개 은행의 12년치 직원 채용 자료를 분석해 은행 자체 채용·아웃소싱 인원을 전수조사하고 청년과 여성, 비정규직 채용비율도 조사하겠다는 구상이다. 또 은행이 각 산업에 지원한 자금 규모와 고용유발계수를 활용해 대출을 통한 일자리 창출 기여도 등 간접적 일자리 창출 규모도 살펴보겠다고 했다.
결과 발표는 금융위가 예고한 8월에서 넉 달가량 미뤄지고 있다. 금융위 측은 “처음 하는 조사이다 보니 통계를 취합하면서 실제 데이터 등을 수집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며 이달 안에는 발표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다만 금융권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자칫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닌지 말이다.
시중은행들은 일자리 성적표를 두고 당국 눈치를 살피며 하반기에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의 채용규모를 발표했다. 금융권은 디지털화로 비대면 거래가 늘면서 인력수요가 줄었지만 금융당국의 정책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금융권에 따르면 국내 4대 은행의 국내 영업점 수는 지난해 말 3087개에서 올해 6월 말 3044개로 줄었다. 같은 기간 이들 은행의 정규직 직원 수는 5만7082명에서 5만6030명으로 감소했다. 3월 말 기준으로 은행 비대면 계좌 수는 작년 대비 76.4% 증가했다.
금융산업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금융당국은 지난달 30일 10개 은행을 시작으로 오픈뱅킹 시범서비스에 들어갔다. 하나의 애플리케이션(앱)으로 모든 은행 계좌에서 출금이나 이체가 가능하다. 핀테크 사업자들은 일일이 개별 은행과 제휴를 맺을 필요 없이, 모든 은행의 결제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은행들은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럽다고 토로한다.
상황이 이러니 금융당국의 ‘금융권 일자리 창출효과 측정 계획’을 보는 시각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사업 간 경계가 허물어지고 근무 유연성이 강조되는 시대에 역행하는 고전적 양질의 일자리를 위한 줄세우기라는 지적이 나온 배경이다.
금융위는 은행별 일자리 창출효과가 아닌 전반적인 금융권의 일자리 창출 기여도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하지만 개별 은행들은 여전히 부담스럽다. 발표는 하지 않지만 이미 금융위는 그 결과를 손에 쥐고 있다.
금융당국은 우물 안에 갇힌 시각에서 벗어나 대지관어원근의 자세로 금융권의 일자리 창출 정책을 고민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