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 속으로] 힘의 역사는 바뀐다

입력 2019-07-17 17:58 수정 2019-07-18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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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호 이베스트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윤지호 이베스트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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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에게서 잊힐 뿐이다. 현실에서 멀어진 과거는 무의식 속에 남아 있고,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면 의식 위로 떠오른다. 일본 아베 정부가 시작한 도발은 ‘1965년 청구권 협정’이라는 과거를 수면 위로 떠올렸다. 우리 사회에 ‘일본은 이웃인가? 아니면 적인가?’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1965년 청구권 협정은 우리에게 재론의 대상은 아니었다. 우리가 받을 것을 받았고, 일본도 한국 내 재산을 포기하고, 줄 것은 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산상 채권, 채무만을 다루었을 뿐 개인의 손해와 고통은 고려하지 않았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이 지점을 향해 있다. 끝난 문제를 다시 꺼낸다는 비판도 있다. “일본 기업들이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1965년 청구권 협정의 근간을 흔드는 것일 수도 있다.

해방 이후 일본이 남긴 수많은 적산(공장, 점포, 기계, 가옥 등)은 한국 정부로 귀속되었다. 미 군정은 1947년부터 적산을 불하하고, 불하받는 민간인들에게 자금도 지원한다. SK는 일본의 군복을 생산하던 선경직물회사의 직원이었던 최종건이 적산을 불하받은 것이었고, 한화는 조선화약공판회사의 지배인이었던 김종휘가 낙찰받아 한국화약을 설립한 것이다. ‘적산’이라는 한국 내 재산이 상당했기에 1965년 청구권 협정 과정에서 일본은 오히려 역청구권 논쟁을 제기했지만, 한일 간의 갈등을 원하지 않았던 미국의 중재로 청구권 협정이 체결되었다. “재한 일본인 재산 취득으로 한국의 대일청구권은 어느 정도 충족되었다”는 미국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다.

한국의 중화학 공업화 역시 일본의 돈과 기술이 큰 기여를 했다. 대표적으로 포항제철도 일본의 기술과 돈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규모가 크건 적건, 적산 불하받은 민간인들이 이후 한국 사회의 주류가 되었다. 한국과 일본 경제는 깊게 연결되어 있었고, 한국은 일본을 카피하면서 발전했다. 일본도 다르지 않다. 1853년 개국 이래 서구 열강과 마지못해 불평등 조약을 맺는다. 일본은 이의 개정을 위해 총력을 다해 국력을 배양하고, 이후 대륙으로 나아간다. 일본의 국제화는 한마디로 서양을 복사, 붙이기한 것이다. 1862년 일본은 영일 대역사전을 출간하였다. 보고 배운 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본인의 특성은 지식 자본의 축적으로 연결되었고, 서구의 기술이 일본화되면서 사회의 발전은 당연히 따라왔다.

일본이 서구를 받아들이고 극복했듯이, 한국도 일본을 극복해가고 있다. 현대차는 미쓰비시의 기술을 토대로 시작했지만 이제 자체 엔진 기술로 성장하고 있고, 삼성전자는 일본 기업과의 협력과 경쟁 속에서 세계를 제패했다. 지금의 한국은 100년 전과도 1965년과도 다르다. 한국은 강해졌고, 역설적이게도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와 몇몇 조치는, 일본을 따라잡고 있는 한국의 힘을 견제한 것이기도 하다. 당장은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일본 역시 서구를 따라잡는 과정에서 견제는 뒤따랐다. 1986년의 미·일 간 반도체 협정 체결은 한국 반도체 산업 도약의 계기가 되었다. 미국이 떠오르는 태양으로 불리던 일본 경제를 견제하는 틈새를 삼성전자가 파고들었던 것이다.

일부에서는 일본과의 갈등을 이를 빗대어 우려하기도 하지만 상황은 다르다. 일본은 미국이 아니다. 실제 일본의 규제 방향은 우리 주력 산업인 메모리 반도체를 비껴가고 있다. 일본의 규제로 삼성전자와 SK반도체의 생산 차질이 뒤따른다면 이미 시작된 4차 산업혁명의 투자 사이클은 흔들리게 되고, 이는 일본이 감당하기 힘들다. 한국을 과대평가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K-POP에서 쉽게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K-POP의 출발점은 J-POP을 베끼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아이돌 오디션인 ‘프로듀스 101’에서 아이즈원이 탄생할 무렵, 이미 한국은 일본을 압도하고 있음을 춤과 음악으로 확인했다. 양국의 문화 차이라고 평가절하하기에는 AKB48과 국내 연습생과의 간극은 너무 컸다. 이제 일본판 ‘프로듀스 101’이 현지에서 방송될 예정이다. 일본의 엔터 기업이 한국의 시스템을 익히려고 애쓰고 있었다. 강해진 한국을 우리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

힘의 역사는 바뀐다. 오랜 한일 교류를 보면 한국은 가르치는 입장이었고, 일본은 배우는 입장이었다. 고대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일본은 한반도를 통하여 대륙의 지식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8세기 후반부터 일본은 우리를 압도했다. 대륙이 아닌 해양 세력의 변화를 먼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8세기에 일본의 난학자들은 20여 년간의 노력을 거쳐 ‘해체신서’를 발간한다. 그들은 기존의 한방치료와는 다른 의술의 세계를 먼저 보았고, 그때 이미 네덜란드라는 프리즘을 통해 그들은 서양을 보고 있었다. 조선이 중화사상의 절대적 가치 속에서 우월의식에 젖어 있을 때 일본은 난학을 매개로 중국을 재평가했고, 그 힘으로 동아시아의 패자가 된다.

여전히 필자는 일본의 저력을 높이 평가한다. 첫 일본 여행 중 기노쿠니야 서점에서 봤던 충격을 잊지 못한다. 투자 관련 서적 대다수가 일본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여전히 번역보다 원본 내용을 짜깁기하거나, 무단 인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은 한국이 답답할 뿐이다. 기초과학이 부실하고, 제대로 된 번역서 한 권보다 짜깁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현실이 한국을 뒤처지게 한다. 일본은 조선을 통해 한자와 불교를 배우고, 네덜란드어로 서양을 받아들이고, 이후에는 영국의 정치제도와 독일의 군사제도를 도입했다. 그 모든 원동력은 바로 그들의 흡수 능력에 있다. 일본은 외부의 문화를 받아들여 그들의 언어로 내면화하고 재창조하는 데 능숙하다. 한국의 번역문화와 기초과학은 여전히 일본에 한참 못 미친다. 여전히 일본이 극복해야 할 대상인 이유이다.

일본은 우리와 언어 구조도 비슷하고, 용모도 유사하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을 미심쩍어한다. 일본이 법적 잣대로 우리를 기망한 것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 이후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일본은 조선을 조공국에서 완전한 자주 독립국으로 바꾸어 불렀지만, 실제로는 조선에서 일본의 독점적 지위를 인정한 것이었다. 아시다시피 청일전쟁 이후 러일전쟁을 거쳐 일본은 조선을 병합한다.

역사가 주는 교훈을 잊지 말자. 일본은 1875년 강화도 사건이 일어나기 10여 년 전에 ‘만국공법’이라는 국제법 관련 도서를 출간했다. 자신의 언어로 국제법을 이용했고, 우리는 그저 당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많은 분야에서 일본을 따라잡았지만, 지적 토대는 여전히 부족하다. 무형자산의 시대, 이제 ‘극일’은 지식 산업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여전히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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