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 간 기술패권 전쟁에 일본까지 가세하게 됐다. 세계 최대 반도체 장비업체인 미국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AMAT)가 일본 고쿠사이일렉트릭을 약 2500억 엔(약 2조7000억 원)에 인수하기로 했다고 1일(현지시간) 니혼게이자이신문이 보도했다.
미중 기술패권 전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AMAT는 차세대 이동통신망인 5G 시대가 본격화하면서 자동차와 산업기계 등 다양한 분야에 필요한 고급 반도체 장비 개발을 위해 고쿠사이 인수에 나섰다고 신문은 전했다.
고쿠사이는 히타치국제전기에서 분사한 반도체 장비업체로, 미국 사모펀드 KKR가 2017년 히타치제작소로부터 인수했다. AMAT는 연내 KKR로부터 고쿠사이의 주식 전량을 취득할 예정이며, 조만간 인수 소식을 공식 발표할 것이라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5G 시대에는 자율주행차량이나 인공지능(AI)을 사용해 생산효율을 높인 ‘스마트 공장’ 보급이 확산될 전망이다. 이에 자동차와 산업기계 등에서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하는 고부가가치 반도체 개발이 요구된다.
반도체 제조는 실리콘 웨이퍼 가공에서 전자회로 형성, 조립 등 여러 공정에 있어 필요한 장비가 각각 다르다. 이런 장비 생산을 전적으로 맡게 되면 삼성전자와 인텔 등 반도체 생산업체들과 공동으로 첨단 기술과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게 돼 설계 변경과 개발이 훨씬 수월해진다.
고쿠사이는 반도체 웨이퍼에 산화막을 형성하는 성막장치에 강점을 갖고 있다. 리서치 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고쿠사이 인수 후 AMAT는 글로벌 반도체 전공정 장비시장에서 점유율이 18%에서 20%대로 높아진다. 반도체 장비는 웨이퍼 생산에서 회로를 입히는 작업까지인 전공정과 조립과 검사, 모듈 작업인 후공정으로 나뉜다.
신문은 기술패권 경쟁 속에서 미국이 국제적으로 경쟁력이 우수한 일본 장비업체를 끌어들여 업계 재편을 더욱 가속화하려는 형국이라고 지적했다.
AMAT의 반도체 장비업계 재편 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AMAT는 2013년 도쿄일렉트론과의 합병을 발표했지만 미국 당국의 승인을 얻지 못해 백지로 끝났다.
이번에는 반도체를 둘러싼 미·중 신경전이 최고조에 이른 가운데 중국 당국이 제동을 걸 가능성이 있다. 중국은 ‘중국 제조 2025’ 정책의 일환으로 반도체 자급자족을 목표로 반도체와 관련 장비산업을 육성하는 ‘반도체 굴기’를 추진하고 있다. AMAT는 중국 측에 기술이 유출될 것을 우려해 고쿠사이 인수에 더욱 적극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한 반도체 장비업체 임원은 “중국 당국이 이번 인수를 허용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앞서 미국 상무부는 지난 4월 자국 기업이 거래에 주의해야 할 이른바 ‘미확인 리스트(Unverified List)’에 37개 중국 기업과 대학 등 연구기관 리스트를 포함했다. 이는 화웨이테크놀로지에 적용했던 블랙리스트인 ‘엔티티 리스트(Entity List)’는 아니지만 여전히 기업들이 거래에 문제가 없다는 문서를 제출하는 등 절차를 요구한다.
미 상무부의 조치에 따라 AMAT는 같은 달 중국 1위 발광다이오드(LED) 업체인 산안광뎬(三安光電)과 시안교통대학 등 최소 3개 중국 기업·연구기관과의 거래를 중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