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예보] 웹툰 '피에는 피' 연제원 작가 "빨갱이 트라우마는 시대적 아픔"

입력 2019-04-09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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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제원 작가의 작품 ‘피에는 피’는 19금 나이 제한이 있다. 독자층이 좁아질 수도 있지만 나이 제한을 둔 이유는 줄거리에 반드시 필요한 잔인한 고문 내용을 빼고 싶지 않아서다. (나경연 기자 contest@)
▲연제원 작가의 작품 ‘피에는 피’는 19금 나이 제한이 있다. 독자층이 좁아질 수도 있지만 나이 제한을 둔 이유는 줄거리에 반드시 필요한 잔인한 고문 내용을 빼고 싶지 않아서다. (나경연 기자 contest@)

“극우나 극좌는 어디에나 있어요. 내 정치적 성향을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회가 정상 아닐까요?”

네이버 웹툰 ‘피에는 피’는 남북통일이라는 흔치 않은 배경을 두고 이야기가 흘러간다. 주인공 백강수는 북한 정권을 전복시킨 북한 관료 4인방에게 배신을 당하고, 온 가족을 잃는다. 백강수가 잔인하게 4인방을 처단해 나가는 ‘피에는 피’는 복수극을 넘어, 우리 사회의 이념 갈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4일 서울 서대문구에서 만난 연제원 작가는 우리 사회에서 다소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빨갱이’를 언급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연 작가는 남들이 우파든 좌파든 그들의 정치적 성향을 인정해주는 것이 정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상대방의 정치적 성향을 잘못됐다고 손가락질하고, ‘빨갱이’ 같은 특정 단어에 발작하듯 반응하는 것은 우리나라만이 가진 역사적 아픔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연 작가는 ‘피에는 피’를 그리게 된 계기에 대해 통쾌함을 주는 복수극을 좋아하고, 클리셰 덩어리가 아닌 새로운 소재의 복수극을 찾다 보니 이런 작품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출처='피에는 피'의 한 장면)
▲연 작가는 ‘피에는 피’를 그리게 된 계기에 대해 통쾌함을 주는 복수극을 좋아하고, 클리셰 덩어리가 아닌 새로운 소재의 복수극을 찾다 보니 이런 작품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출처='피에는 피'의 한 장면)

“하나의 명백한 사실이 있어도 누군가의 의도가 들어가면 그 순간부터 진실은 흐려지기 마련이야. 이 나라는 ‘빨갱이’란 단어에 트라우마가 있으니까.”

매카시즘. 반공주의 성향이 강한 집단에서 정치적 반대자나 집단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려는 정치적 전략이다. ‘피에는 피’에서 남북을 통일시킨 4인방 우두머리 장광택은 매카시즘에 탁월하다.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 위험이 되는 인물은 ‘빨갱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여론의 질타를 받도록 유도한다.

독자들은 장광택의 대사를 보며 낯설지 않은 느낌을 받는다. 장광택의 매카시즘이 현실 정치인들의 전략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후보들은 선거철만 되면 상대에게 정치적 프레임을 씌운 뒤, 특정한 방향으로 여론을 호도한다.

“웹툰이 아무리 가상의 이야기라지만, 남북통일이라는 소재 자체가 우리나라를 아예 떼어 놓고 말할 수 없자나요. 따라서 현실이 다소 반영되지 않았을까요?”

장광택이 해당 대사를 말하는 장면에서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한 네티즌이 “그래서 우리나라에 빨갱이가 없다는 말이냐”라고 쓴 댓글이 베스트댓글로 올라오기도 했다. 남북통일이라는 소재와 이념 갈등을 다루는 주인공들의 대사는 대부분 작가가 피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연 작가는 오히려 담담해 했다.

“웹툰은 웹툰 이야기로만 봐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댓글을 종종 보는데 독자들이 현 정권과 웹툰 줄거리를 비교한다든지,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정치적 의도로 이 작품을 그린 것은 아니고, 오로지 재밌는 이야기를 찾다 보니 남북통일이라는 새로운 소재와 줄거리가 나왔어요.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이념 갈등도 다루게 된 것이죠. 물론, 독자들이 제 작품을 보고 드는 생각까지는 제가 막을 수 없는 부분이겠죠.”

▲경력 11년차인 연 작가는 가장 두려운 것이 독자들에게 잊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목표는 시대를 불문하고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고전처럼, 유행을 타지 않는 재밌는 이야기를 그려내는 것이다. (출처='피에는 피'의 한 장면)
▲경력 11년차인 연 작가는 가장 두려운 것이 독자들에게 잊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목표는 시대를 불문하고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고전처럼, 유행을 타지 않는 재밌는 이야기를 그려내는 것이다. (출처='피에는 피'의 한 장면)

“네놈 새끼들이 어떤 괴물을 만들어 냈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될 거야.”

백강수가 자신의 가족을 몰살시킨 북한 관료 4인방을 향해 내뱉는 분노의 대사다. 웹툰을 넘어 현실에도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은 존재한다. 연 작가는 법의 처벌을 이리저리 피해 가는 권력형 범죄자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말했다.

“장자연 사건, 김학의 사건 모두 법이 심판해야 할 사건이에요. 그런데 돈 많은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 힘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법망을 자유롭게 피해가요. 부실한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물렁한 사회가 권력자의 범죄를 방관한 것이죠. 범죄를 저지르고 처벌은 받지 않는 권력자들. 이들이 사회가 낳은 괴물이에요.”

그럼에도 연 작가는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피에는 피’ 작품에서 백강수가 4인방을 모두 처단하는 것 역시 그런 희망을 담은 결말이다. 사회가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있어야 하고, 작품 속에서는 4인방의 죽음이 의미 있는 사건이다. 이런 사건들이 모여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된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으로 우리 사회의 안전불감증을 확인했고, 박근혜 사건을 계기로 민주주의가 더 발전했어요. 사회에 대한 불안과 걱정은 백 년 전에도 있었을 것이라고 봐요. 하지만, 두려워만 해서는 안 되니까 좋은 방향으로 사회가 변하기를 바라는 것이죠.”

▲연 작가는 독자들에게 ‘피에는 피’ 한 장면을 그려달라는 요청에 “밤은 길고, 네놈 혀도 기니까”라는 대사를 그림 옆에 적었다. 그는 팬들도 좋아하고, 자기도 좋아하는 대사라고 설명했다. (나경연 기자 contest@)
▲연 작가는 독자들에게 ‘피에는 피’ 한 장면을 그려달라는 요청에 “밤은 길고, 네놈 혀도 기니까”라는 대사를 그림 옆에 적었다. 그는 팬들도 좋아하고, 자기도 좋아하는 대사라고 설명했다. (나경연 기자 contest@)

“시대의 변화는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사람은 그저 변화에 맞게 새로운 그림을 그려야 하는 법이라고.”

북한 관료 4인방은 자신들이 왜 북한의 정권을 전복시키고, 통일을 택했는지를 이같이 설명한다. ‘변화’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사다. 그는 올해 횟수로 11년 차 작가지만, 시대의 빠른 변화에 잊힐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피에는 피’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히는 빠른 전개와 속도감 역시 이런 고민 덕이다.

“원래는 전개 속도가 느리고 호흡이 긴 작품을 좋아했는데, 이런 식으로는 독자들에게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도 전에, 독자들을 잃겠다는 걱정을 했어요. 요즘은 다들 빠른 속도를 좋아하니, 그것에 맞춰 작품을 그리는 것도 당연한 선택이었죠. 최근 JTBC 드라마 ‘스카이캐슬’ 드라마의 미친 듯한 속도감이 큰 인기를 얻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시청자들의 취향을 알게 됐죠. 이런 빠른 속도로 다작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아요.”

연 작가의 데뷔작은 사극, 두 번째 작품은 SF였다. 그리고 현대물인 ‘피에는 피’를 그렸다. 이렇게 여러 장르에 두루 도전하는 이유는 ‘스스로 뭘 잘하는지 모르니 다양한 이야기를 해보고, 스스로가 특출난 분야를 찾아봐라’라는 미생 윤태호 작가의 조언 때문이다. 남북통일이라는 파격적인 소재를 다룬 ‘피에는 피’ 역시 도전의 일환이었고, 다행스럽게도 많은 인기를 얻어 ‘추격자’와 ‘늑대소년’을 제작한 영화사에서 조만간 영화 제작에 들어갈 예정이다.

윤 작가는 자신이 평범한 시민이지만 ‘웹툰’이라는 소통 창구를 소유하고 있는 것만은 큰 힘을 가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소통의 창구가 있기에 자신이 사회로부터 느끼는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것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웹툰이라는 창구를 통해 거창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 적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요. 독자들을 만족하게 하는 재밌는 이야기, 이것 하나 그리기도 쉽지 않죠. 다만, 제가 그린 재밌는 이야기가 시대를 막론하고 새로운 이야기였으면 해요. 고전처럼 시대를 타지 않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수요가 있는 그런 이야기를 그리고 싶은데, 제가 더 노력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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