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진의 만년필 이야기] 살아남은 것이 강하다

입력 2019-03-2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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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연구소장

영화 ‘짝패’를 보면 이런 대사가 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닌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만년필 세계에 이 대사와 꼭 어울리는 회사가 있다. 지금이야 몽블랑이 제일이지만, 한 세대 전 약 60년 동안 파커는 최고 자리에 있었다. 그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한마디로 유연함이다.

화살클립으로 유명한 파커는 만년필 역사상 현존하는 두 번째로 오래된 회사이다. 아시다시피 가장 오래된 회사는 이야기의 진위(眞僞)를 떠나 잉크를 왈칵 쏟아 계약서를 망쳐 실용적인 만년필을 만들게 되었다는 L.E. 워터맨이 설립한 워터맨이다. 이 두 회사가 만년필 사업을 시작한 때는 워터맨이 1883년, 파커가 1888년으로 5년 정도 워터맨이 이르다. 이 시기 미국은 가히 발명가의 시대였다. 발명왕 에디슨과 자동차 왕 헨리포드 역시 이때의 사람들이다. 만년필 세계 역시 자고 나면 새로운 것이 나왔다. 유행은 빠르게 지나가 약간 과장하면 어제 1등이었던 회사가 오늘은 꼴등이 되는 시대였다. 사실 이 시기엔 지금은 없어진 폴 이 워트(Paul E. Wirt)라는 회사가 있었다. 워터맨과 비슷한 시기에 설립된 이 회사는 1895년에 누적 100만 개 판매를 돌파하는데 이것은 만년필 세계 최초였다. 참고로 워터맨은 그때까지 17만6000개를 누적 판매하고 있었다. 1880년대와 1890년 중반까지 명실상부 업계 1위는 워트였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회사를 잘 모르는 것일까? 위와 아래의 표준 싸움에서 워트가 패배했기 때문이다.

만년필의 펜촉은 아래를 보면 새까만 혓바닥 같은 것이 붙어 있다. 이것을 전문용어로 피드(feed)라고 부른다. 이것의 역할은 말 그대로 만년필 몸통에 저장된 잉크를 펜촉까지 공급해주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피드는 아래에 붙어 있는 것이 당연한데 1880년대엔 두 가지 방식이 존재했다. 펜촉 위에 있다고 오버피드(over feed)는 워트, 아래 있는 것은 언더피드(under feed)로 워터맨 방식이었다. 대중은 처음엔 워트의 것을 선호했다. 당시 사람이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잉크를 공급하는 장치가 펜촉 위에 있어야 종이가 잉크로부터 안전하고, 반대로 피드가 펜촉 아래 있으면 혹시 종이 쪽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건 기우(杞憂)였다. 펜촉 아래 있어도 언더피드 방 잉크가 떨어지지 않았고 피드가 펜촉을 가리지 않아 미관상으로도 훨씬 좋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워터맨 방식을 훨씬 더 많이 찾기 시작했고, 1903년 워트에서 언더피드의 만년필을 출시하면서 이 표준 싸움은 워터맨의 승리로 끝난다. 이후 워트는 별 볼 일 없는 회사로 전락해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파커사(社)의 창업자 조지 셰퍼드 파커
▲파커사(社)의 창업자 조지 셰퍼드 파커
이 표준 싸움에 파커는 어떤 전략을 취했을까? 자동차왕 헨리 포드와 동갑인 창업자 조지 셰퍼드 파커(George Safford Parker·1863~1937)는 전신(電信)학교 교사였다. 손재주가 좋았던 그는 당시 학생들이 사용하던 만년필을 부업으로 팔기도 하고 고쳐주기도 했다. 그러던 중 특허를 냈고, 이것이 만년필 사업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889년 등록된 첫 번째 특허는 당연히 물어볼 것도 없이 오버피드 방식이다. 유연한 사고를 갖고 있었던 파커 역시 당시 가장 잘 팔리는 방식은 오버피드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기 때문이다. 이 오버피드는 1894년 그 유명한 럭키커브 피드가 처음 등장할 때까지 유지된다. 언더피드 방식의 출현은 1897년으로, 워트의 매출이 주춤하는 시기에 절묘하게 등장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만년필은 더 길다. 살아남아야 기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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