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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장(阿修羅場)’.
회생법원의 첫 인상이다. 내내 고개를 떨군 기업 대표와 한숨과 고성을 번갈아 내뱉는 주주들, 잠자코 절차를 따르는 채권단 관계자의 이해관계가 시공을 초월한다.
회생이란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에서 희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깊은 좌절이다. 회생은 아득한 죽음의 기억이 가까스로 토해내는 날숨이다. 이투데이가 희망과 절망 사이 그 어디쯤에 놓인 회생기업들을 하나하나 만난다. 그들에게 닥친 위기와 그 이후 회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회생 이후의 모습을 남긴다. 이 기록이 지금 이곳에서 버티고 있는 수많은 기업들에게 ‘반면교사’이자 참고서인 동시에 미래를 위한 대비책이 되길 바란다.
2017년 3월 1일. 국내 최초의 ‘회생법원’이 등장한다. 그동안 서울중앙지법 파산부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법인과 개인 파산이 잇따르면서 전담 법원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돼 왔던 터다. 그러다 2016년 말 법원조직법 등이 개정되면서 미국 파산법원과 유사한 파산만을 담당하는 법원의 출범이 공식화된다. 이 과정에서 ‘파산(破産)’이란 부정적인 어감을 대신해 “살아난”다는 의미가 강조된 회생(回生)이 선택되면서 국내에선 파산법원이 아닌 회생법원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회생법원이 출범한 이틀 후인 3월 3일, 국내 건설사 하나가 이곳에 처음으로 회생절차를 신청한다. 이날은 회생법원이 출범을 알리며 업무추진방향을 공개한 시점으로, 아직 회생법원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던 때다. 당시 기업들은 법정관리보다는 워크아웃을 선호했다. 사실상 기존에 통용되던 법정관리 절차를 그대로 따랐던 것인데, 그 주인공은 공교롭게 앞서 한 차례 법정관리를 졸업한 중견 건설사 ‘한일건설(대표이사 양승권)’이다.
◇건설업계 침체와 함께 찾아온 위기…35위에서 119위로 추락
한일건설은 1970년 2월에 설립된 삼원진흥건설이 전신이다. 1978년 한일시멘트가 건설업에 진출하면서 이를 인수했고, 그해에 지금의 한일건설로 상호가 변경됐다. △1997년 서해안고속도로 서천~군산 구간 건설 △1988년 국내 최초 테마공원인 서울랜드 준공 △2005년 숙명여대 백 주년 기념관 건축 등이 대표적인 성과다. 이밖에 한일건설은 토목과 건축, 아파트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두 차례의 법정관리를 들어가기 전 한인건설은 2008년 토건 시평액 기준 35위까지 올랐던 주요 중견 건설사 중 하나였다.
2008년 이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국내 건설경기는 급격하게 악화한다. 위기는 항상 그렇듯 대형기업보다는 중견기업의 어려움을 가속한다. 한일건설 역시 공사 미수금이 늘면서 당시 중견건설 업체를 중심으로 만연했던 프로젝트파이낸싱(PF)이 화근이 됐다. PF는 담보 대신에 프로젝트의 수익성을 보고 자금을 제공하는 금융기법으로, 투자한 뒤 나오는 이익으로 채무를 갚는다. 따라서 완공되지 못한 건물들이 우후죽순 늘어나면서 이에 대한 채무가 부메랑으로 돌아온 셈이다. 2010년 3월 말 한일건설은 PF대출 규모가 1조 원에 육박했다.
분양사업도 지지부진했다. 캄보디아 프놈펜 뉴타운개발 사업과 괌 아파트 공사 등 해외사업에서도 발목이 잡혔다. 여러 악재가 겹쳤고, 2010년 6월 중 산업은행이 한일건설을 ‘부실징후기업’으로 분류하면서 위기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때 한일건설에 대한 채권공동관리(워크아웃) 얘기가 처음으로 흘러나오게 된다. 같은 해 10월 한일건설은 결국 주채권은행인 국민은행과 경영정상화 계획을 담은 이행약정을 체결하고 본격적인 워크아웃에 나서게 된다.
당시 국내 건설사는 대개 워크아웃 이후 살아남지 못하고 법정관리로 가는 수순을 밟았다. 회생법원의 탄생도 이러한 우울한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 기존의 워크아웃 과정에선 금융채무 이외에 신용채무에 대한 조정도 필요하다. 이 때문에 워크아웃을 마쳤다고 하더라도 이후에 신규자금을 구하긴 어려웠다. 부채만 탕감받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결국 한일건설은 이러한 선례를 극복하지 못하고, 워크아웃으로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도 잠시 30개월만인 2013년 2월 첫 번째 회생절차에 들어가게 된다.
◇사활을 걸었던 리비아 사업이 ‘덜미’
워크아웃 과정에서 한일건설에도 희망은 있었다. 건설경기 악화를 체감하고 있던 한일건설은 다른 건설사와 마찬가지로 해외사업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2008년 12월 리비아 행정센터 개발위원회(ODA)와 수도 트리폴리에서 서쪽으로 50㎞가량 떨어진 도시 ‘알자위야’에 총공사비 1조1187억 원 규모의 주택단지(4000가구)를 건설하는 대규모 공사를 수주한다. 이 규모는 당시 한일건설이 건축공사로 진행하던 전체 규모의 기말잔액(1조460억 원)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매출액의 200%에 달하는 한일건설로서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회사의 사활을 걸고 뛰어든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 공사가 채 마무리되지 않았던 2011년 리비아에서 내전이 발발하면서 공사를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기회는 더 강한 위기로 전환됐다. 수주가 미뤄지면서 공사 대금을 제때 받지 못한 것은 물론 과도정보를 상대로 파손된 설비 보상 문제도 한일건설의 발목을 잡았다. 당시 큰 유동성 위기를 겪은 한일건설은 2012년 기준 4451억 원의 영업손실과 2988억 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한다.
한일건설은 2015년 4월, 법정관리에 들어선 이후 2년 2개월 만에 기업회생절차를 가까스로 졸업한다. 하지만 결국 리비아 사업은 좌초했고, 경상남도 양산시 한일아파트 옹벽붕괴의 책임을 놓고 시와 소송을 벌인 끝에 패소하면서 2016년 말 또다시 재정에 타격을 입었다. 한일건설이 새로 태어난 회생법원을 다시 찾은 배경이다. 건설사 30~40위권을 유지하던 한일건설은 2017년 119위까지 추락하게 된다.
◇회생법원 이후 한일건설은 다시 살아났나?
다시 찾은 회생법원에서 한일건설은 새로 주인을 맞는다. 고려제강이 인수목적으로 세운 베라체홀딩스가 새 주인이다. 회생절차 과정 중 인수업체가 빠르게 들어오면서 회생절차도 신청한 지 8개월 만에 졸업했다. 당시 고려제강뿐 아니라 삼라마이더스(SM) 그룹도 한일건설 매수에 참여했지만, 고려제강이 우선매수권을 행사하면서 최종 인수자로 낙점됐다.
회생법원을 졸업한다는 것은 ‘죽은 기업이 살았다’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법정관리를 밟은 기업은 다시 법원을 찾는다”라는 말처럼 여전히 한일건설의 미래는 장담하기 어렵다. 2017년 말 기준 한일건설의 자산총계는 2153억 원, 부채총계는 1448억 원으로 회생절차에 들어가기 전 겪었던 완전자본잠식에선 벗어났다. 하지만 영업손실은 2016년(46억 원)에 비해 2017년에 134억 원으로 3배 이상 늘면서 여전히 법정관리 기업이라는 꼬리표를 벗어나지 못했다. 매출도 회복하지 못하면서 수주 적체를 보이는 것이다.
다만 회생법원을 통해 한일건설은 하나의 지평을 열었다. 회생기업이 인수의향자와 공개입찰을 전제로 인수계약을 맺는 방식인 스토킹 호스(Stalking Horse)의 우선매수권이 작용한 첫 사례였기 때문이다. 그간 이 방식이 시도된 적은 많았지만, 공개입찰 단계에서 가능성 있는 원매자가 참여한 경우는 없었다. 수의계약자였던 고려제강은 SM그룹이 경쟁입찰 과정에서 제시한 가격을 받아들이는 우선매수권을 행사하고 입찰자에게 토핑피(Topping : 후순위 매수 의향자에 보전하는 실사 비용)까지 얹어 총 약 270억 원에 한일건설을 인수했다.
이 제도 전에는 공개입찰을 하는 바람에 인수합병(M&A) 시장에서는 ‘승자의 저주(경쟁에서는 이겼지만 과도한 비용을 치름으로써 후유증을 겪는 상황)’이 나타나기 일쑤였다. 스토킹 호스 방식에서는 인수의향자를 확보한 상황에서 공개입찰로 전환하기 때문에 기존보다 더 나은 조건만 제시하면 그만이다. 인수자 입장에서도 부담이 덜하고, 법정관리 과정에서 사업성이나 성장성이 저평가 당하기 쉬운 회생기업에게도 기회가 보장되는 길이 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