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1년 새만 네번째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석유화학업계의 가격담합을 또 적발해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127억원을 부과했다. 네번의 적발을 통해 부과된 과징금만 이번까지 1770억원을 넘어선다.
왜 유독 유화업계에서는 담합 사례가 끊이지 않는 것일까. 이번에 부과된 과징금 부과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논란도 있다. 네번의 적발에 의해 드러나지 않은 기타 품목들에 대한 담합 여부에 대한 의혹도 가시지 않는다. 또한 업계가 장기간 담합을 해왔고 상습적으로 걸리는 업체들은 계속 걸려들었다는 점에서 특단의 근절 조치가 이어져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 발각된 상습담합 사례들
공정위는 지난 22일 SK에너지, GS칼텍스, 삼성토탈, 삼성종합화학, 호남석유화학, 대림코퍼레이션, 동부하이텍, 씨텍(옛 현대석유화학) 등 8개 업체가 지난 2000~2005년새 스티렌모노머(SM), 톨루엔(TL), 자일렌(XL), 모노에틸렌글리콜(MEG), 디에틸렌글리콜(DEG), 에틸렌옥사이드(EO) 등 6개 품목에 대한 가격 담합 사실을 확인해 시정조치했다.
이번 조사결과에서 해당 업체들은 각 품목별로 영업담당 실무자들간에 담합 모임을 갖고 우선 판매 기준가격을 결정하는 가격공식에 따라 매월 구체적인 판매가격을 합의해 결정한 것이 드러난 것. 품목별 가격공식은 주로 해당 품목의 원재료가격, 국제시세, 국내 판매비용 등을 감안해 결정하는 명백히 담합행위를 한 것이다.
앞서 공정위는 지난해 6월 유화업계의 가격담합을 적발한 사례는 호남석유화학, 대림산업, 대한유화공업, LG화학, SK, 삼성토탈, 삼성종합화학, 씨텍, 효성, GS칼텍스 등 10개업체에 대해 고밀도폴리에틸렌(HDPE)과 폴리프로필렌(PP)에 대한 가격 담합사실을 적발했다.
공정위는 이들에 대해 총 1045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으며 대림산업, 대한유화공업, LG화학, SK, 효성 등 5개사는 검찰에 고발했다.
이들은 1994년 4월부터 2005년 4월까지 사장단회의, 영업임원회의, 영업팀장회의 등을 통해 판매가격의 기준이 되는 기준가격을 매월 합의했다. 전월에 합의한 판매 기준가격에 대한 실행과 점검을 위해 매월 회의를 개최하고 실제 판매 마감가격을 합의하는 등 가격담합 행위를 무려 11년간 지속해 왔다.
또한 공정위는 금호석유화학과 씨텍 등 2개 합성고무 제조사에 대해 지난해 6월 22일 타이어 원료인 합성고무(SBRㆍBR)의 판매가격 인상을 합의하는 방법으로 가격담합 행위를 3년간 지속한 것에 대해 57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2개사는 2000년 3월부터 2003년 3월까지 영업실무자 모임을 통해 총 4회에 걸쳐 가격 담합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와함께 공정위는 올해 3월 6개 저밀도폴리에틸렌(LDPE) 및 7개 선형저밀도폴리틸렌(LLDPE) 제조 판매사의 가격과 관련 공동행위를 적발했다.
LDPE는 호남석유화학, 한화석유화학, LG화학, 삼성종합화학, 삼성토탈, 씨텍등 6개사, LLDPE는 호남석유화학, 한화석유화학, LG화학, 삼성종합화학, 삼성토탈, 씨텍, SK에너지다.
이들은 1994년 4월부터 2005년 4월까지 가격담합 행위를 지속해 왔다.
주기적인 사장단회의, 영업임원회의, 영업팀장회의 등을 통해 LDPE, LLDPE의 용도별 대표제품과 기준가격을 합의했다. 합의한 가격에 따라 각자의 거래처에 판매하고 판매가격을 상호 점검하는 편법을 써왔다. 이들에 대해선 총 542억원의 과징금이 부과된 가운데 한화석유화학, 삼성토탈, SK에너지 등 3개사는 검찰에 고발됐다.
◆ 상습가격담합 하는 이면
이같은 유화업계의 가격담합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관련업계 한 관계자는 "정부의 기간산업 육성 차원에서 업계의 정기적인 모임을 사실상 묵인해온 측면이 강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생산되는 제품이 차별성이 적고 획일성까지 띠는 범용제품임에 따라 가격경쟁을 하게 되면 전체 업계만 힘들어지기 때문에 가격경쟁을 제한하는 쪽으로 업계가 움직일 수 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석유화학산업은 석유 정제품인 납사(Naphtha)를 원료로 에틸렌, 프로필렌, 톨루엔, 자일렌 등의 기초원료와 SM 등의 중간원료를 만들고 다시 이를 원료로 합성수지 (PE, PP 등), 합섬원료 (AN, EO, EG 등), 합성고무 (SBR, BR 등) 유도품을 제조하고 있다.
유화산업은 실제로 자동차, 전기전자, 건설, 섬유산업 등 국가 주력산업에 기초소재를 공급하는 기간산업이자 '산업의 쌀'이라고도 불리는 실정이다.
담합사실이 적발된 제품군인 HDPE는 일회용 쇼핑백, 우유용기 등으로 LDPE는 비닐하우스 및 비료포대용 비닐 등의 주원료로 LLDPE 식품포장용 비닐(랩) 등, PP는 필름, 어망, 로프, 각종용기 등, SBR은 타이어 등으로 BR은 타이어, 튜브, 신발 등의 주원료로 사용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유화업계의 가격담합과 인위적인 가격결정에 따라 이들이 생산한 제품을 원료로 하는 기업들의 원가 인상과 가격 경쟁력 하락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결국 소비자 가격 부담 상승까지 귀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 업계 자정노력 한다지만
공정위가 유화업계에 대해 담합과 관련 조사의 칼을 뺀 것은 지난 2005년 상반기였다.
이후 유화업계는 재빨리 자정노력에 힘을 쏟고 있다. 이 업계는 지난 2006년 공정거래자율준수 선포식을 개최했고 다수 사업자들이 공정거래 자율준수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등 공정경쟁 문화정착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달 22일 8개사 6개 제품 담합건은 가격합의가 대부분 구두로만 은밀하게 이루어져 직접적인 증거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 등 공정위 차원에서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지만 관련업계가 자진신고를 해온 가운데 공정위가 조사를 착수한 것도 업계 자정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공정위는 이번 조치가 석유화학산업 기초원료부터 중간원료, 합성수지, 합섬원료, 합성고무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서 발생한 일련의 담합행위에 대해 2007년부터 진행한 시정조치를 마무리하는데 의미를 두고 있다.
유화업계의 이러한 노력과는 별도로 관련업계 일각에서는 다른 시각도 내놓고 있다.
이번 22일 공정위의 시정조치와 관련 현행법상 과징금에 대한 고시 규정에 따르면 가격 담합 행위의 경우 관련 매출액의 최대 5~10%까지 부과할 수 있게 돼 있다. 하지만 공정위는 유화업계의 자진신고에 따라 과징금을 0.9%수준에서만 물렸다.
아직도 기초원료인 에틸렌, 프로필렌, 벤젠 등 담합사실이 드러나지 않은 제품들에 대해선 어떤 관행으로 유화업계가 가격을 결정하는 지 또한 가격담합행위가 행해지는 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관련업계 한 관계자는 "유화업계가 공정위의 또 다른 제품군에 대한 추가 조사를 피하고 과징금마저 감면받기 위해 자진신고 한 것이라는 의혹도 들고 있다"며 "유화업계의 시정조치와 관련 조사 대상 기간은 2005년까지라는 점도 한계"라고 말했다. .
공정위 관계자는 "신고나 협의 등 구체적 사실이 접수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정위가 담합여부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는 것은 무리수"라며 "아직까지 담합사실이 드러나지 않은 유화산업 품목들에 대해서도 담합여부에 대한 조사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