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환의 Aim High] 우리 이니 하고 싶은 거 다 해

입력 2019-01-1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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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경제부장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의 입에서 여간해서는 나오지 않는 단어였다. 맞은편 소파에 깊이 파묻힌 이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임자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람 아니었소? 그런 임자가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지원하겠다는데 포기를 해요?”

박정희 대통령은 담배를 꺼내 문 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뒤 정주영 현대건설 사장에게도 한 대를 건넸다. 담배를 피지 않는 정 사장이었지만, 조용히 불을 붙여 손에 쥐었다.

1970년 초 어느 날,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로 달려갔다. 그날 밤 박 대통령은 정 회장에게 조선사업을 권유했다. 이미 삼성 이병철 회장은 거절의 뜻을 밝힌 상태였고, 건설업자인 정 회장에게 대형 선박건조는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정 회장은 특유의 배짱 좋은 승낙으로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을 걷어냈다. “각하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까짓거 한번 해 보겠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영국 선박 컨설턴트 기업 A&P 애플도어의 찰스 롱바텀 회장을 만나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든 것은 그로부터 1년 뒤의 일이다.

현대중공업을 탄생시킨 정 회장의 배포와 모험심, 불 같은 기업가 정신을 깎아내릴 생각은 1도 없다. 박정희 정부를 한국경제 발전의 원동력이라 치켜세울 마음도 전혀 없다.

다만 조선업 세계 1위의 신화는 정주영 회장의 대담함에 정부가 미친 짓으로 손발을 맞추며 생겨났다는 점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경제발전 계획을 시작한 1960년대 중반까지 한국은 세계은행(World Bank)의 저개발국 경제발전계획을 충실히 따르는 모범생이었다. 세계은행은 당시까지 가발, 신발, 의류산업 등 경공업 육성을 저개발국이 가난에서 탈출하는 공식으로 사용했다. 대규모 자본과 인프라, 설비 등이 없는 상태에서는 노동집약적 산업인 경공업이 유일한 해법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세계은행의 강한 반대에도 경공업을 버리고 중화학공업을 육성한다는 미친 짓을 시작했다. 나라 곳간도 변변찮던 시절, 세계은행이 “이런 식이면 차관 제공을 중단하겠다”고 통보하자 대통령이 세계를 돌며 손을 벌리는 구걸외교에까지 나섰다. 이 와중에 시작된 정주영 회장의 울산조선소 건설이 눈앞에 다가오자 정부는 1973년 1월 ‘중화학공업 육성선언’으로 맞장구를 치는 팀워크를 발휘했다.

삼성이 벌인 미친 짓에도 알고 보면 정부가 제공한 멍석이 깔려 있다. 1974년 이건희 이사가 “한국반도체를 인수하겠다”고 하자 아버지 이병철 회장마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국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를 사들였지만 10여년 동안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룹 내에서도 설비투자 자금을 내주는 곳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삼성반도체에 손을 내민 것은 국책은행인 수출입은행이었다. 수출입은행은 반도체가 뭔지도 제대로 몰랐던 시절, 유일하게 삼성의 반도체 사업에 돈을 빌려주며 지원에 팔을 걷었다.

외환위기를 맞아 기업이 위축되자 정부가 혼자 미친 짓을 벌인 적도 있다. 1998년 6월 부도 맞은 나라의 리더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과 마주앉은 뒤 “인터넷 코리아”를 제시하고 밀어붙였다. 브로드밴드 구축을 먼저 시작했던 나라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뒤처졌던 한국인들이 외국에만 나가면 느려터진 인터넷에 혈압 오르는 사람들이 된 배경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정부의 미친 짓은 여기까지였다. 4대강 사업의 삽질이 창조경제라는 뜬구름으로 한발 더 후퇴하더니 소득주도 성장의 신기루로 사라져갈 위기다. 정부는 기업가 정신의 후퇴를 말하기 전에 스스로 모험가 정신과 동업자 정신부터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중화학공업화 선언부터 초고속인터넷망 구축까지 40여 년간 이어지던 ‘돌아이노믹스’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소득 3만 달러이니 4차 산업혁명이니 내 귀에 캔디 같은 소리 말고 “5년 안에 전국 모든 차량을 자율주행 수소연료차로 대체한다” 거나 “내년부터 국내 유선 인터넷을 모두 걷어내고 5G 모바일 망으로 바꾼다”는 등의 미친 계획을 세워보면 무슨 일이 생길지 궁금해진다. 수요예측이니 사업타당성 검토니 먹지말고 기업에 양보한 뒤 정부가 미쳐보면 어떨까. 우리 이니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된다지 않나. w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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