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60년 만에 찾아온 '황금 돼지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집집이 돼지를 길렀고, 돼지꿈은 길몽이라며 크게 반겼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돼지가 새끼들을 품에 안고 젖을 빨리는 사진을 걸어놓거나, 새해 첫 돼지날(上亥日)에 문을 열어놓는 등 돼지를 부와 복의 상징으로 여겼다. 돼지해를 맞아 행운과 재운이 따르기를 바라는 이들을 위해 '돼지투어'를 추천한다.
전국 곳곳에 돼지의 기운을 가득 담은 이야기와 체험지가 여럿 있다. 한국관광공사는 황금 돼지의 기운을 물씬 느낄 수 있는 국내 여행 명소를 '1월 가볼 만한 곳'으로 선정했다. 첫 번째 '돈(豚·돼지)투어' 주제는 온몸으로 돼지를 느끼는 '먹방'이다.
◇ 거리 이름이 삼겹살인 이유가 있었네…'청주 삼겹살거리' = 두툼한 생삼겹살, 간장 소스, 지글지글 불판에 고기 익는 소리…. 충북 청주시 서문시장에는 '삼겹살거리'가 있다. 삼겹살 식당이야 흔하디흔하지만, '삼겹살거리'라는 이름이 붙은 곳은 청주가 유일하다. 이곳에는 삼겹살 식당 15곳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삼겹살거리는 삼겹살 먹자골목이 들어선 서문시장은 청주 시민에게 향수 어린 장소다. 버스터미널이 있던 서문시장 일대는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었다. 두툼한 삼겹살에 소주 한잔 걸치려고 부담 없이 찾던 공간은 시외버스터미널이 가경동으로 이전하며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한때 육거리종합시장 못지않게 번성한 서문시장은 유동 인구가 감소하며 동력을 잃어 공동화 현상을 겪었다. 상인들이 이전하고, 삼겹살 식당도 겨우 명맥을 유지해왔다. 2012년 삼겹살 식당이 의기투합해 삼겹살거리로 재탄생했다. 시장 골목은 리모델링을 거쳐 간판과 조형물이 새롭게 들어선 추억의 삼겹살 특화 거리로 바뀌었다.
초창기 7곳이던 삼겹살 식당은 15곳으로 늘었다. '충주돌구이집', '삼남매', '야간비행', '금순이은순이', '함지락' 등은 삼겹살거리를 굳건하게 지켜온 식당이다.
◇ '파절이' 원조는 청주?…삼겹살 삼합 먹으러 오세요 = 청주에서는 두툼하게 썬 돼지고기를 간장 소스에 담갔다가 굽는다. 소금을 뿌려 먹는 데서 간장 소스를 곁들여 먹는 방식으로 변모한 것이 청주 삼겹살의 트레이드마크다.
일본식 소금구이를 뜻하는 '시오야키' 간판을 내건 청주 삼겹살집에서는 예부터 간장 소스가 함께 나왔다. 간장 소스는 수퇘지를 식육으로 사용하던 시절, 잡냄새를 없애려고 쓰기 시작했다. 달인 간장은 육질을 부드럽게 하는 효과도 있다. 삼겹살거리의 식당은 조선간장에 생강, 당귀, 계핏가루, 마늘, 녹차 등 10여 가지 재료를 넣어 특유의 소스를 만든다.
국산 생고기를 숙성시켜 사용하는 것은 삼겹살거리 식당이 오랜 시간 지켜온 원칙이다. 삼겹살은 0.8cm 정도로 두툼하게 썰어 내놓는다. 너무 얇으면 구울 때 육즙이 쉽게 사라져 맛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청주 삼겹살거리를 제안하고 <썰며 쓴, 삽겹살 이야기>를 발간한 함지락의 김동진 대표는 "삼겹살은 짜글이와 함께 청주의 대표 음식"이라며 "선홍빛이 선명한 등살에, 구웠을 때 고소한 냄새가 나야 좋은 삼겹살"이라고 강조한다.
'파절이'는 간장 소스와 함께 청주 삼겹살의 맛을 돕는다. 이곳 상인들은 파절이가 청주에서 태동했다고 주장한다. 식초, 설탕, 고춧가루를 넣어 매콤하고 달콤하고 새콤한 파절이는 두툼한 삼겹살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여기에 묵은지까지 곁들이면 '간장 소스 삼겹살+파절이+묵은지'로 삼겹살 삼합이 완성된다.
삼겹살거리 식당은 각양각색이다. 서문시장에서 수십 년 정육점을 운영하다가 오픈한 식당도 있고, 채소 장사하던 형수와 함께 식당을 꾸린 가게도 있다. 자매의 손맛이 야무진 집, 야간 손님만 받는 식당 등 다양하다.
메뉴 역시 간장 소스 곁들인 전통의 맛을 이어오는 곳이 있고, 새로운 변신을 모색한 식당도 있다. 능이버섯을 곁들인 삼겹살, 연탄 구이, 백반식 삼겹살, 등갈비 삼겹살 등 손님 취향을 고려해 식당이 다변화했다.
◇ 춘향전 말고 돼지고기를 기억해…'전북 남원 운봉 지리산 흑돼지' = 남원 하면 반사적으로 춘향전이 떠올리기 쉽다. 광한루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몽룡과 성춘향의 사랑 이야기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안다. 하지만 사실 춘향전과 광한루를 빼면 남원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아는 사람은 안다. 남원시는 추어탕 다음으로 흑돼지를 내걸고 있다. 남원을 여행하다 보면 추어탕 다음으로 많이 보이는 식당이 '흑돼지' 간판을 단 집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삼겹살의 민족'으로 불릴 만큼 삼겹살을 사랑한다. 그중 흑돼지 삼겹살의 인기는 말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 흑돼지 삼겹살은 시장이나 마트 정육 코너에서 일반 삼겹살보다 10~20% 비싸게 팔린다. '프리미엄'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다. 남원에 왔다면 일단 흑돼지를 맛보고 여정을 떠나자. 광주대구고속도로 지리산 IC로 빠져나오면 길 양쪽에 흑돼지고기를 내는 집이 여럿 보인다. 이 가운데 한 식당은 영국 버크셔주 원산의 버크셔종(Berkshire) 흑돼지 고기를 내놓는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이곳에서는 모둠구이를 주문하면 삼겹살과 목살, 앞다리, 항정살, 가브리살, 갈매기살을 담긴 쟁반을 내놓는다.
◇ "흑돼지는 덜 익은 게 제맛"…놓칠 수 없는 '감칠맛' = 직원은 "고기가 부드러워 목살에 칼집을 낼 필요가 없다"며 "이 칼집은 보기 좋으라고 낸 것"이라고 설명한다. "백돼지는 150~180일 키워서 도축합니다. 출하할 때 90kg 정도죠. 100kg이 넘으면 등 쪽 지방이 너무 두꺼워 상품 가치가 떨어집니다. 흑돼지는 200일 이상 지나야 그 크기가 나와요." 비쌀 수밖에 없다.
붉은색이던 고기가 노릇하게 익어간다. 지글거리는 소리가 나고 기름이 흘러나온다. 흑돼지는 백돼지와 달리 기름이 투명하다. 직원에 따르면, 한 연구에서 불포화지방산 함량이 오리고기보다 많다는 결과를 내놨다고.
고기가 어느 정도 익자 직원이 권한다. "조금 덜 익어도 됩니다. 쇠고기를 미디엄으로 익혀 먹잖아요. 그보다 살짝 더 익히면 됩니다." 흑돼지 고기는 완전히 익히지 말고, 적당히 붉은빛이 돌 때 먹으면 더 맛있다. 흑돼지 고기는 포도당과 유리아미노산이 다른 돼지고기보다 풍부한데, 완전히 익히면 이 감칠맛이 사라진다.
앞다리와 뒷다리도 쫄깃하다. 이 부위는 질기고 푸석푸석해 대부분 찌개용으로 팔리지만, 흑돼지 다리는 구이용으로 판매된다. 다른 돼지고기보다 근섬유가 가늘고 촘촘히 박혀 더 부드럽다. 단, 수육을 만들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육질이 부드러워 일반 돼지고기처럼 삶으면 살이 흐물흐물해진다. 조금 덜 삶는 것이 요령이다.
◇ 뒷다리는 맛없다고? 생햄 먹어보면 생각 달라질 걸 = 버크셔종으로 생햄도 만든다. 생햄은 스페인의 전통 음식 하몽이라고 보면 된다. 운봉읍 화수리에 하몽과 살라미를 만드는 곳이 있다. 돼지 몸무게의 30%를 차지하는 뒷다리, 후지라 불리는 이 살은 두루치기나 찌개에 넣는 싼 부위지만, 2년 정도 숙성을 거치면 최고급 식재료로 다시 태어난다. 짭짤하면서도 은근한 풍미에 자꾸 손이 간다.
먼저 늦가을에 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절인다. 수퇘지는 살짝 냄새가 나기 때문에 250~300일 정도 된, 150kg 정도 나가는 암퇘지만 쓴다. 천일염으로 한 달 정도 절인 뒤에는 깨끗이 씻어 염도를 낮춘다. 겨울에 온도 12℃, 습도 75~85%를 유지해야 풍미가 제대로 산다. 봄이 되고 기온이 20℃ 정도로 올라가면 본격적으로 발효가 시작된다.
"돼지 지방을 녹여 겉에 바르는 작업도 중요해요. 너무 빨리 건조하면 껍데기가 딱딱해지고 속은 마르지 않기 때문이죠." 생햄을 만드는 '솔향기' 오인숙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이곳에서 만든 생햄은 다리 하나가 7kg으로 70만 원 선이다. 70g에 2만 3000원 정도에 팔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