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벗겨야 사는 '필환경' 시대…포장지 없는 가게 '더피커' 가보니

입력 2019-01-09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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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지 없는 가게 '더피커'의 인테리어는 독일의 '오리기날 운페어팍트'와 비슷했다.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식료품은 작은 유리통에 담았고, 식료품이 팔리는 대로 직원이 계속 채워 나갔다. (나경연 기자 contest@)
▲포장지 없는 가게 '더피커'의 인테리어는 독일의 '오리기날 운페어팍트'와 비슷했다.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식료품은 작은 유리통에 담았고, 식료품이 팔리는 대로 직원이 계속 채워 나갔다. (나경연 기자 contest@)

마트들이 포장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독일의 '오리기날 운페어팍트', 미국의 '더 필러리', 영국의 '벌크 마켓', '언패키지드' 모두 포장지 없는 식료품 가게다.

소비자는 필요한 식재료를 집에서 가져온 포장 용기와 장바구니에 담아 구매한다. 용기를 미처 챙기지 못한 소비자는 매장 내에서 파는 자연분해 용기를 함께 계산한다.

환경적 사고가 '선택'이 아닌 '필수'인 시대가 도래한 것. 김난도 서울대학교 교수는 그의 저서 '트렌드 코리아 2019'를 통해 "그동안 환경을 생각하는 소비가 '하면 좋은 것'이었으나, 이제는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선택해야 하는 '필(必)환경'의 시대가 왔다"라고 언급했다. 점차 기업들도 소비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끌어내는 환경 캠페인을 확대하고 있다.

서울 성동구에 위치한 '더피커'는 국내 최초의 포장지 없는 가게다. 2016년 문을 연 더피커는 '일상에서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는 삶을 실천할 수 있도록, 제로 라이프 스타일 플랫폼을 공유한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동시에 '그로서란트' 개념도 실현 중이다. 그로서란트(Grocerant)란 식재료(Grocery)와 음식점(Restaurant)을 합쳐 만든 용어로, 구매한 식재료들을 그 자리에서 요리해 먹는다는 뜻이다. 더피커에서는 모양이 예쁘지 않거나 흠이 많아 판매하지 못하는 식재료들을 활용해 샌드위치와 햄버거 등을 판매하는 음식점을 운영 중이다.

▲소비자는 필요한 식재료를 집에서 가져온 포장 용기와 장바구니에 담아 구매한다. 용기를 미처 챙기지 못한 소비자는 매장 내에서 파는 자연 분해 용기를 함께 계산하면 된다. (나경연 기자 contest@)
▲소비자는 필요한 식재료를 집에서 가져온 포장 용기와 장바구니에 담아 구매한다. 용기를 미처 챙기지 못한 소비자는 매장 내에서 파는 자연 분해 용기를 함께 계산하면 된다. (나경연 기자 contest@)

"무게는 어떻게 측정해요?"

8일 오전 11시, 20대 여성 3명이 들어와 가게를 찬찬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들은 매장에서 판매하는 식재료를 꼼꼼히 살피고, 자연분해 용기들을 만져보며 서로 대화를 나눴다.

친구들과 점심을 먹기 위해 더피커에 들른 디자이너 김 모(26) 씨는 "이곳 매장은 처음 방문하지만, SNS를 통해 매장 사진을 많이 봤고, 여러 번 검색을 해봐서 더피커가 어떤 곳인지는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플라스틱 사용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꾸준히 해왔고, 일상생활에서는 일회용 대신 텀블러를 사용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김 씨 친구들 역시 포장 없는 가게가 낯설지 않은 듯, 내부를 몇 분 둘러보더니 자연분해 용기 몇 개와 약간의 식재료를 구매했다.

뒤이어 들어온 대학생 이모(23) 씨도 "인스타그램에서 유명하길래 친구와 함께 찾았다"면서 "자주 가던 스타벅스에서도 종이빨대를 쓰는 등 일상생활에서 '플라스틱제로' 운동을 많이 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다"라고 말했다.

▲콧구멍에 플라스틱 빨대를 낀 채 발견된 코스타리카의 바다거북이가 피를 흘리는 모습을 담은 유튜브 영상은 온라인상에서 큰 이슈가 됐고, 9일 기준 조회수 3355만 건을 기록하고 있다. (출처=유튜브 영상 캡처)
▲콧구멍에 플라스틱 빨대를 낀 채 발견된 코스타리카의 바다거북이가 피를 흘리는 모습을 담은 유튜브 영상은 온라인상에서 큰 이슈가 됐고, 9일 기준 조회수 3355만 건을 기록하고 있다. (출처=유튜브 영상 캡처)

플라스틱제로의 관심은 지난해 말부터 본격 일어났다. 콧구멍에 플라스틱 빨대를 낀 채 발견된 코스타리카의 바다거북과 뱃속에 80개의 비닐봉지를 담아두고 있던 말레이시아 동근 머리 돌고래 사진은 전 세계인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줬다.

국내에서 가장 큰 사건은 중국의 플라스틱 수입 중지 선언이었다. 중국 정부는 재활용 쓰레기 처리 지역의 환경오염이 특히 심각한 것을 발견했다. 이에, 중국 환경보호부는 지난해 7월 폐플라스틱, 폐금속 등 고체 폐기물 24종에 대해 수입 금지령을 내렸다.

전 세계 폐기물의 50%를 수입하던 중국의 선언은 사람들의 삶에 고스란히 불편함을 가져왔다. 아파트 단지에서 플라스틱을 가져가던 업체들이 수거를 중단했고, 아파트 내 분리수거장은 플라스틱 쓰레기로 넘쳐났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환경부는 황급히 2030년까지 플라스틱 배출량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목표를 발표했다.

이후 매장 안에서 일회용 컵 사용을 금지하거나 마트에서 일회용 비닐봉지 사용을 금지하는 정책들이 시행됐지만, 쓰레기 배출과 처리에 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나오지 못했다.

▲송경호 대표는 어떻게 용기에 식료품을 담아야 하는 지를 설명하면서 제로웨이스트 라이프를 일상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나경연 기자 contest@)
▲송경호 대표는 어떻게 용기에 식료품을 담아야 하는 지를 설명하면서 제로웨이스트 라이프를 일상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나경연 기자 contest@)

송경호 더피커 대표는 해결책으로 라이프의 변화를 꼽았다. 일상에서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는 제로라이프 스타일을 습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송 대표는 "'제로웨이스트가 환경적이니까 포장 없는 가게를 이용해보세요'라고 강요하는 것보다 그로서란트 같은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유인하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플라스틱제로를 실천할 수 있는 구매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고, 그것이 제로웨이트 실천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최근 환경에 관심을 두는 고객이 많이 늘어났다"면서 처음 매장을 시작했을 때는 식료품 매출과 식당 매출이 8대 2였는데, 지금은 5대 5로 바뀌었다"라고 덧붙였다.

송 대표는 판매 분야를 식료품에서 화장품이나 샴푸, 보디샴푸 같은 세정 제품으로까지 확대하려고 했지만, 많은 한계를 느꼈다. 그는 "외국의 제로웨이스트 매장에 가보면 정말 다양한 제품들이 있는데, 국내에서는 규제 때문에 제한적 판매만 가능한 상황"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더피커' 가게 벽면에는 '프리사이클링'이란 단어가 적혀있다. 프리사이클링은 '미리 조금 수고함으로써 폐기물 발생을 최소화'하는 방식이다. (나경연 기자 contest@)
▲'더피커' 가게 벽면에는 '프리사이클링'이란 단어가 적혀있다. 프리사이클링은 '미리 조금 수고함으로써 폐기물 발생을 최소화'하는 방식이다. (나경연 기자 contest@)

해마다 1200만 톤의 플라스틱이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이 엄청난 양의 플라스틱들은 햇빛을 받아 미세 플라스틱으로 잘게 쪼개진 뒤, 플랑크톤을 비롯한 해양생물의 몸으로 들어간다. 먹이사슬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플라스틱 조각들은 다시 인간의 몸으로 들어가 자리 잡는다.

이제 프리사이클링·제로웨이스트·플라스틱제로 라이프는 인간이 생존을 위해 필수적으로 선택해야만 하는 것들이다. 지구라는 거대한 존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나를 생각해서 실천하는 '필환경'. 새해에는 우리 모두의 목표가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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