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의 세계 역시 색상으로 여성용과 남성용을 구분했던 적이 있다. 1970년대 일본에서는 뚜껑이 크고 몸통이 짧아 분수로 치면 가분수인 일명 ‘빅캡 만년필’이 유행했다. 당시 사람들은 평상시엔 짧지만 뚜껑을 뒤로 꽂으면 길어지는 이 만년필을 와이셔츠 상의 주머니에 꽂고 다녔다.
이 만년필에 남성용과 여성용의 구분이 있었다. 분홍, 빨강, 아이보리, 하양에 나비 또는 꽃 그림이 있는 것들은 여성용이었고 이보다 좀 크고 검정인 것은 남성용이었다. 사실 만년필이 만들어지고 한참 동안 여성용은 별도로 없었다. 보통 남성들이 사용하는 것보다 한 치수 작은 학생용이 곧 여성용이었다.
그러던 중 1910년대 새로운 만년필이 등장했다. 만년필 뚜껑의 꼭대기에 회중시계처럼 동그란 고리가 달려 있어 ‘링 톱(ring top)’이라고 불린 만년필이었는데, 옷에 주머니가 없어 휴대가 불편했던 여성들에겐 안성맞춤이었다. 여성들은 이 만년필을 회중시계처럼 줄을 연결해 핸드백에 넣거나 목에 걸었다. 이런 수요가 늘자 만년필 회사들은 딱히 여성용이라고 하지 않던 것을 여성이 선호한다고 광고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여성용으로 한정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여성용 만년필의 등장이 여성의 사회 진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1920년 미국에서 여성의 참정권이 완전히 확립된 이후에 등장한 만년필을 보면 이 점을 보다 확실히 알 수 있다. 1922년 파커사는 ‘레이디 듀오폴드(Lady duofold)’를 출시하는데 이것은 ‘여성이 선호한다’ 등의 소극적 표현이 아니라 대놓고 여성 만년필이라고 이름 지어 내놓은 것이다.
이것이 성공했을까? 성공 여부를 알아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라이벌의 움직임을 보면 알 수 있다. 1920년대 파커의 둘도 없는 라이벌은 셰퍼이고 그다음이 워터맨이었다. 셰퍼를 보면 1925년까지만 해도 ‘for women’이라는 것이 있을 뿐 레이디라는 만년필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1926년이 되면 레이디 라이프 타임이 등장한다. 1~2년이 아니라 몇 년이 지나 따라 한 것을 보면 아주 큰 성공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1달러 정도에 저렴한 펜을 만들던 Ingersoll Dollar 만년필 회사에서도 1927년 레이디스(Ladies)라는 이름의 만년필이 나오는 것을 보면 레이디 만년필은 점차 자리를 잡아간 셈이다.
당시 가장 큰 회사였던 보수적 성향의 워터맨은 1920년대 내내 레이디 만년필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29년 회사의 명운을 걸고 만든 새로운 최상위 라인인 퍼트리션(Patrician) 만년필에도 파커나 셰퍼처럼 레이디 만년필은 없었다. 하지만 이 보수적인 회사도 대세를 거스를 순 없었다. 워터맨사는 1930년 퍼트리션보다 크기는 작고 밴드와 클립은 가늘고 짧은 레이디 패트리샤(Lady Patricia)를 내놓는다. 워터맨까지 레이디 만년필을 내놓게 되자 여성용 만년필은 확실히 자리를 잡게 된다.
요즘은 남성용, 여성용의 구분이 있을까? 없다. 나는 분홍색 만년필을 쓴다. 예전에 초등학교 때 짝이 그랬듯이 누가 “왜 분홍이야?” 하고 묻는다면 “남자는 핑크야”라고 대답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시대이다. 만년필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