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L이 요즘엔 전철을 타면 화가 난단다. ‘임산부 배려석’에 앉는 ‘임산부 아닌 이들’ 때문이라고. 결국 L은 임산부 배려석을 지키고 있다. 출퇴근길, 빈자리가 있어도 앉지 않고 임산부 자리 바로 앞에 서서 그곳에 앉으려는 ‘임산부 아닌’ 이들을 막고 있다.
“노약자석으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할아버지께선 임신하지 않았잖아요”, “아저씨, 설마 아이 가졌어요?” “아가씨, 어쩌려고 그래요. 여긴 임산부 자리예요”…. 민망해하며 다른 곳으로 가는 이들도 있지만, “별꼴이야. 임산부가 없는데 아무나 앉으면 어때요(20대 여성)”, “그래, 나 임신했다(50대 남성)” 등등 싸우자고 달려드는 이들도 많단다.
L은 오늘도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임신한 여성들이 마음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임산부 배려석은 항상 비워두는 문화가 형성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그는 40대 중반의 ‘남자’이다.
그런데 ‘임산부 배려석’은 적절한 말일까? 아마도 ‘임산부(姙産婦)’를 ‘임신부(姙娠婦)’와 같은 의미로 생각해 사용한 듯하다. 하지만 두 단어는 전혀 다른 뜻을 지녔으므로 반드시 구별해 써야 한다.
임산부는 ‘아이를 밴 여자’를 뜻하는 ‘임부(姙婦)’와 ‘아기를 갓 낳은 여자’를 일컫는 ‘산부(産婦)’를 동시에 표현하는 말이다. 반면 임신부는 아이를 잉태한 여자만을 뜻한다. 다시 말해 임신부는 임부와 같은 말로 산부·산모(産母)의 의미는 없다. 그러니 지하철의 ‘임산부 배려석’은 “내일의 주인공을 맞이하는 핑크카펫”이란 알림 문구와 임신한 여성을 표현한 그림 등을 보았을 때 ‘임신부 배려석’이라는 표현이 더 적확하다.
임신부에게 자리를 양보할 때 “홀몸이 아닌 것 같은데 여기 앉으세요”라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홀몸은 배우자나 형제가 없는 사람, 즉 독신(獨身)을 뜻하기 때문이다. 남편을 잃고 혼자 자식을 키우며 사는 여자인 ‘홀어미’, 아내를 잃고 혼자 사는 남자인 ‘홀아비’를 생각하면 구분하기 쉽다.
간혹 홀몸을 ‘혼잣몸’이라고 풀어서 말하고 쓰는 이들도 있는데, 이 말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이시옷이 빠진 ‘혼자몸’은 홀몸을 뜻하는 북한의 ‘문화어(우리의 표준어)’이다.
임신한 여성에게는 “홑몸이 아닌 듯하니 이리 앉으세요”라고 말하면 된다. ‘홑몸’은 아이를 배지 않은 몸을 일컫는다. “홑몸이 아니니 ○○○하세요”, “홑몸이 아니니 ○○○하면 안 됩니다”처럼 주로 부정어와 함께 쓰인다. ‘홑-’은 ‘한 겹으로 된’ 또는 ‘하나인, 혼자인’의 뜻을 더하는 접사로, 홑이불·홑껍데기·홑바지 등으로 활용된다.
임신 8개월 기준 태아와 양수 무게는 6.5㎏에 이른다. 표가 나지 않는 초기엔 태아에게 영양분을 주고, 입덧과 갑작스러운 신체 변화로 엄청난 피로감을 느낀다. 임신부에 대한 주변의 배려가 필요한 이유이다. “앉고 싶다.” 임신한 여성의 소리 없는 바람이 들리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