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이야기] 29. 짝퉁은 진짜 최고품을 알게 해준다

입력 2018-11-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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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만년필연구소장

나는 중학교 때 교문 앞에서 만년필을 파는 아저씨한테서 가짜 파커45를 샀다. 미국 파커사(社)와 기술 제휴를 했다는 둥 청산유수와 같은 말솜씨에 속아 산 것은 아니었다. 그 만년필이 파커사와 아무 관련이 없고 우리나라에서 만든 가짜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진짜는 너무 비쌌고 가짜라도 화살클립에 새부리의 모양 펜촉, 점점 가늘어지는 날렵한 몸통의 파커45는 정말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요즘도 이런 가짜가 있을까? 나와 같은 사람들이 아직도 있기 때문인지 서울 동묘역 벼룩시장에 가면 금세 한 움큼 구할 수 있을 만큼 많다. 세월이 40년 가까이 흐르면서 파커가 몽블랑으로, 생산지가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나라와 중국이 했던 이런 일을 일본이 했었고, 독일 역시 완전히 똑같은 가짜는 아니었지만 모방하며 발전했다.

그런데 별로 중요할 것 같지도 않은 이 모방 역사의 속을 들여다보면 꽤나 재미있는 것을 찾아낼 수 있다. 가짜나 모방품은 그 시대 최고 인기를 반영한다. 이 사실을 잘 이용하면 100년 넘는 세월과 수많은 종류가 있는 광대한 만년필의 세계에서 최고로 인기 있던 만년필만 쏙쏙 골라 낼 수 있다.

어떤 회사의 모방 역사가 가장 좋을까? 다들 관심이 많은 몽블랑은 약 100년 전인 1922년 레버필러 만년필을 출시한다. 레버필러는 미국 셰퍼사가 원조로, 몸통의 성냥개비 반만 한 막대를 당겨 잉크를 충전하는 방식이다. 셰퍼사는 이 충전방식 덕택에 단숨에 미국시장에서 워터맨, 파커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2년 뒤인 1924년 몽블랑은 셰퍼를 또 따라하는데 평생 보증의 마이스터스튁(Meisterstueck: 걸작, 명작이라는 뜻의 독일어. 영어로는 Masterpiece)라인을 출시한 것이다. 이 역시 1920년에 시작된 셰퍼가 최초였다.

▲ 독일 라미 사파리와 미국 파커 45. 왼쪽 두 개가 한국과 중국에서 만든 짝퉁이다.
▲ 독일 라미 사파리와 미국 파커 45. 왼쪽 두 개가 한국과 중국에서 만든 짝퉁이다.
그리고 1929년엔 버튼 필러가 장착된 만년필을 내놓는데 몸통 뒷부분의 꼭지를 눌러 잉크를 넣는 방식은 파커사의 것이었다. 이렇듯 몽블랑은 1920년대 셰퍼와 파커를 따라했다. 당시 셰퍼의 대표는 라이프타임, 파커는 듀오폴드였다. 이 둘은 1920년대 당시 최고로 인기가 좋았던 걸 반영한 제품이다.

그렇다면 한걸음 더 나아가 최고의 만년필을 이 방법으로 가려낼 수 없을까? 후보는 누구나 인정하는 두 가지이다. 파커 51(1941~1978)과 몽블랑 149(1952~현재). 먼저 파커 51이 모방된 것을 찾아보자. 1958년 독일 명가 중 하나인 펠리칸사가 1958년에 출시한 P1은 클립만 다를 뿐 파커51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닮았다. 또 같은 독일의 라미(Lamy)사가 1966년에 내놓은 라미 2000은 위와 아래 평평한 것을 빼곤 파커 51의 한 종류라 해도 될 만큼 비슷했다. 이밖에도 영국 데라루사(社)가 1955년에 내놓은 오노토 K 역시 파커 51을 꼭 닮았다. 1950~1960년대에는 이들 말고도 파커 51과 비슷한 것들이 많이 만들어졌지만, 딱히 몽블랑 149를 닮은 것은 없었다.

파커 51의 완승일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현대로 오면서 파커 51을 따라 만든 만년필은 없고 몽블랑 149를 따라 만든 만년필이 많기 때문이다. 일본의 예를 들면 파이로트의 74를 비롯한 커스텀라인과, 플래티넘의 센츄리, 세일러의 프로핏트 등은 툭 튀어나온 밴드 모습하며 몽블랑 149의 영향으로 만들어졌다. 정리하면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는 파커 51이,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는 몽블랑 149로 시대를 구분해 보는 것이 맞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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