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가 세계 최대 생체 인식 시스템 ‘아드하르(Aadhaar)’로 빠르게 경제·사회 기반을 다지자 주변 신흥국들 역시 관련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이미 사업을 진행 중인 필리핀은 물론이고 스리랑카와 케냐, 모로코에서도 도입을 검토 중이다.
5일(현지시간) 인도 경제지 파이낸셜익스프레스에 따르면 필리핀 정부는 올 4분기부터 주(州) 정부에서 생계 지원을 받는 약 100만 명의 안구와 지문, 안면 화상 등의 정보를 수집한다. 2022년까지 필리핀인 1억6000만 명이 영구적인 신분 번호를 등록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출생기록이 없는 사람이나 소수민족에게도 차후 적용할 방침이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출생 증명서가 없어 취업을 못하거나 금융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며 올 8월 국가 단일 신분증 도입에 관한 이른바 ‘필시스(PhilSys)’ 법안을 시행했다.
파이낸셜익스프레스는 ‘필(Phil)-ID’라고 불리는 신분증이 인도의 아드하르 시스템을 모방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인도가 아드하르 도입 후 은행 거래가 확연히 늘어난 것처럼 필리핀 역시 필-ID를 통해 더 많은 인구를 제도권 금융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는 최소 1000만 명이 신원 확인 서류가 없어 은행 계좌를 개설하지 못하고 있다. 필리핀 금융권에서는 거래 시 2개 이상의 ID카드나 확인용 문서를 요구하지만 이는 대부분의 필리핀인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필리핀 국가통계국은 약 740만 명이 신분이나 출생 관련 공식적인 기록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이들은 고리대금업자나 전당포에 한 달에 20%에 달하는 이자를 내면서 현금을 융통해야 한다.
필리핀 통계청은 이번 사업 규모를 300억 페소(약 6400억 원) 수준으로 보고 있다. 리사 그레이스 버세일스 필리핀 통계청장은 “기업 40여 곳이 사업 수행과 관련한 제안서를 제출해 검토하고 있다”며 “경쟁력 있는 곳과 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인도의 경제신문인 더이코노믹타임스는 아프리카에서 아드하르나 필-ID 같은 생체 인식 시스템이 도입된다면 더욱 큰 효과를 낼 것이라고 전했다. 여성의 출생을 등록하는 것만으로 아동 결혼이나 성매매 위협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스리랑카와 케냐, 모로코 등은 인도의 사례를 좇아 비슷한 시스템 도입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필리핀에서도 인도와 마찬가지로 생체 인식 시스템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 상황이다. 특히 이 법안에 반대한 의원들은 두테르테 대통령이 반대 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생체 정보를 사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베르살레스 청장은 “수집된 모든 데이터에 기존의 개인정보보호법이 적용된다”며 “그러한 우려는 근거가 없다”고 일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