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1월 6일자 시사주간 타임지는 중국 국가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면서 유명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이 ‘흑묘백묘론’은 일약 세계적인 유행어가 되었다.
중국 개혁개방을 이끈 지도자 덩샤오핑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오늘 중국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은 덩샤오핑과 결코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정치가인 덩샤오핑을 경제인물로 선정하였는지 궁금한 분들도 있을 줄로 안다. 사실 정치의 본령은 곧 경제이며, 경제라는 용어 그 자체가 정치를 내포한다.
경제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정치
모두가 아는 바처럼 ‘경제’라는 용어는 ‘economics’라는 영어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런데 이 ‘economics’는 원래 그리스어로서 “가정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이 용어 역시 일본에서 ‘economics’라는 서구 용어를 ‘경제’라고 처음 번역하였으며, 중국에서 이를 수용하였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경제’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동진 시대의 ‘진서기첨(晋書記瞻)’이라는 책에서였다.
‘경제’라는 용어는 본래 경세제민(經世濟民), 경국제세(經國濟世), 경방제세(經邦濟世), 경방치국(經邦治國) 등 용어의 종합 혹은 약칭이었다. 그 의미는 국가의 재산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각종 경제활동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포함하여 정치, 법률, 군사, 교육 등 분야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국가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휼한다는 의미다.
‘economics’라는 단어 자체도 본래 ‘정치’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실제로 서양의 ‘경제학’은 20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정치경제(political economy)’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왔다. 결국 ‘경제’와 ‘economics’ 두 가지 단어 모두 본래 인문(人文)의 내용을 포괄하면서 동시에 ‘정치’를 내포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자본주의를 배우다
덩샤오핑의 본명은 덩센성(鄧先聖)으로서 1904년 쓰촨성(四川省)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주로 외지를 돌면서 사업을 하였는데, 집안은 대대로 교육을 중시하는 가문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프랑스 유학을 결심하고 충칭(重慶)에 있는 프랑스유학예비학교에 다녔으며, 16세 되던 해 드디어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학비가 모자라 프랑스에 머물렀던 5년 동안 거의 대부분 공장 노동자 생활을 해야 했다. 그리고 이 무렵 중국사회주의청년단 유럽지부에 가입하여 직업혁명가로서의 그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노동자로 살면서 자본주의의 병폐도 직접 목격했지만 동시에 인간 본성에 토대한 자본주의의 장점 역시 목도할 수 있었다. 이 점은 중국 국내에서만 활동한 마오쩌둥(毛澤東)보다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하였고, 이는 결국 뒷날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으로 연결되는 하나의 중요한 배경이기도 했다.
프랑스 생활을 마친 그는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34년에는 중국공산당의 장정(長征)에 참여하였고, 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석권한 뒤에는 국무원 부총리, 국방위원회 부주석에 임명되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덩샤오핑은 대외정책과 국내 정치에서 모두 중요한 정책 결정자였다. 특히 그는 류샤오치(劉少奇) 등 실용주의적 지도자들과 긴밀한 관련을 맺으며 활동했다. 이들 실용주의적 지도자들은 중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물질적인 보상제도를 채택하고 기술 및 경영의 측면에서 숙련된 엘리트를 양성하자고 주창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견해로 인해 점점 마오쩌둥 친위세력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결국 그는 1960년대 후반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류샤오치와 함께 대표적인 ‘주자파(走資派)’로 지목되어 탄압받았고, 1967년부터 3년 동안 모든 직책을 박탈당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은 그야말로 비극의 땅이었다. 붉은 완장을 두른 어린 홍위병들은 거리를 휩쓸고 다니면서 조금이라도 외국풍이 나거나 ‘지성의 냄새’를 풍기는 사람은 무조건 심문하여 모욕하고 두들겨 팼으며 책과 원고를 불사르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 이 와중에 류샤오치는 굶어 죽었고, 덩샤오핑의 가족 두 명은 자살했다. 또 베이징대학 학생이던 덩샤오핑의 큰아들 덩푸팡(鄧樸方)은 ‘반당분자’의 아들로서 온갖 고초를 겪은 끝에 베이징대학 건물에서 추락하여 하반신 불구가 되고 말았다.
“부자가 되는 건 자랑스러운 일”
이렇듯 도탄에 빠진 중국을 구해낸 인물은 바로 덩샤오핑이었다. 그는 1973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지원으로 복권되어 총리가 되었다. 하지만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죽자 이른바 4인방(四人幇)에 의해 다시 권좌에서 밀려났다. 마오쩌둥이 죽고 4인방이 숙청된 후 덩샤오핑은 당과 정부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화궈펑(華國鋒)과 권력투쟁을 벌였다. 여기에서 그는 노련한 정치력과 폭넓은 지지층을 배경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덩샤오핑은 실사구시의 노선과 사상 해방을 확립하였다. 그는 “발전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發展是硬道理]!”라는 유명한 명제를 역설하면서 “부자가 되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선포하였다. 개혁개방의 핵심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곧 인간 본성에 대한 인위적 압제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개인의 책임을 중시했고, 근면과 창의력에 대한 물질적 보상을 강조했다.
그리고 고등교육을 받아 중국 경제성장의 선봉에 설 기술자와 경영자들을 양성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동시에 많은 기업체들을 중앙정부의 통제와 감독으로부터 벗어나게 했으며, 기업가들에게는 생산량을 결정하고 이윤을 추구할 권한을 부여했다. 대외정책 측면에서는 과감한 개방정책을 채택하여 서구와의 무역 및 문화적 유대를 강화했고 중국 기업에 대한 외국의 투자를 허용했다.
덩샤오핑이 아프리카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사회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인민을 잘살게 해주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떤 체제든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개혁개방으로 세계를 개변하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건 이후 보수파가 득세하여 개혁개방이 위협을 받게 되자, 1992년 초 이미 88세였던 덩샤오핑은 노구를 이끌고 중국 남부 도시 선전(深圳)을 비롯하여 주하이(珠海)와 상하이(上海)를 차례로 시찰하면서 유명한 ‘남순강화(南巡講話)’를 발표하였다. 일생을 통하여 위기의 순간 항상 승부수를 던졌던 덩샤오핑의 이 결단은 다시 적중하였고, 그리하여 개혁개방은 탄탄대로를 달릴 수 있었다.
1978년 중국 1인당 GDP는 고작 379달러, 대외무역총액은 206억 달러에 불과했다. 중국은 도시화비율이 10.6%에 지나지 않았으며, 농촌 빈곤인구는 2억5000만 명이나 되는 낙후된 농업국가였다. 하지만 30년에 걸친 개혁개방을 거치면서 국민 1인당 GDP는 2000달러를 넘어섰고, 경제총량은 1978년의 60배에 이르렀다.
그는 개혁파 주룽지(朱鎔基) 부총리 등을 선출하여 개혁개방 정책을 이끌어 나갈 새로운 지도체제를 출범시키고 난 뒤 1994년 이후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1997년 2월 베이징(北京)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스스로 “나는 실사구시파로서 죽음의 길은 걷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자평했던 덩샤오핑은 지금도 절대 다수의 중국인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추앙받고 있으며, 중국 개혁개방과 현대화의 총설계사로 불리고 있다. 타임지는 “덩샤오핑은 세계를 개변(改變)시켰고, 그 공적은 다른 사람과 비견할 수 없다”고 평했다.
덩샤오핑의 장남 덩푸팡의 최근 시진핑(習近平) 비판 발언이 화제다. 보도된 발언 앞뒤로는 ‘실사구시 정신’과 ‘사회주의 초급 단계’라는 말도 있다. 그가 말하고자 한 의도는 아마도 아버지가 강조했던 “빛을 숨기고 새벽을 기다린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 그리고 실사구시의 ‘신중함’일 것이다.
국회도서관 조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