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숫자를 추구하고 숫자로 기억되는 곳, 바로 은행이다. 6조6609억 원. 올해 상반기 6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우리·KEB하나·NH농협·IBK기업은행)의 당기 순이익이다. 저마다 '영업1등'을 목표로 내세운 결과물이다. 평균 연봉 1억 원 육박. 은행원에 대한 탐욕적 색채를 입힌 불편한 이름표다. 이러한 이름표로 취업 준비생은 물론 대다수 직장인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면에는 ‘리딩뱅크’를 향한 과도한 업무와 끝없는 실적 경쟁에 목숨을 잃는 은행원이 있다. 고액 연봉 꼬리표는 은행 직원들의 노동을 가벼이 취급하고, 그들의 과로를 돈과 등가교환한 것처럼 간주하게 했다. 하지만 높은 임금도 법을 넘나들고 인간의 존엄을 상실한 노동을 정당화하긴 어렵다. ‘이투데이’가 삶을 잃거나 포기하는 은행원의 현실을 들여다보고 문제와 해법을 고민한다.
'1926시간 vs 2400시간.'
고용노동부가 집계한 지난해 전체 금융·보험업의 1인당 연평균 근무시간은 1926시간이다. 그러나 노조 측 주장은 다르다. 통상 ‘포괄임금제’에 묶여 각종 수당을 주지 않는 은행권 특성상 숨은 근로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474시간, 날짜로 환산하면 ‘19일’이란 차이가 발생했다. 이 차이가 어디서 발생하는지 은행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름과 소속 직장은 취재원 보호를 위해 익명 처리했다.
◇ 보이지 않는 ‘그림자’ 노동 =은행 문을 닫은 오후 4시. 한 시중은행 지점에서 일하는 이수영(가명) 씨가 ‘그림자 노동’을 시작하는 시간이다. 은행 창구에서 고객들이 떠나고 그에게는 새로운 업무가 시작된다. 상품 가입 서류에 틀린 게 없는지를 살피고 업무 보고서를 작성한다. 은행과 지점, 업무별로 차이가 있지만 퇴근은 저녁 8시를 가볍게 넘기기 일쑤다. 오전 8시 출근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적어도 하루 12시간 넘게 노동을 하는 셈이다. 수영 씨는 "직원들 사이에서는 은행 셔터가 내려간 뒤 일과가 시작된다고 농담처럼 얘기하지만, 고객의 눈에 띄지 않는 시간부터 진정한 하루의 시작"이라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은행원의 하루는 꽉 막혀버린 도로처럼 ‘쉼’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식사할 시간도, 화장실 갈 시간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다. 특히 영업점 직원들은 고객이 몰려오는 오전 9시부터 점심시간까지 제 자리서 꼼짝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근로기준법이 정한 ‘1시간 휴식’은 은행원들에게 무용지물이다. 직원들이 번갈아가며 창구를 지키고 고객을 상대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30~40분 안에 허겁지겁 점심을 때워야 한다. 최근 지점 인력이 줄어든 탓에 상황이 더욱 열악해지고 있다. “점심은 거의 못 먹는다. 점심 시간에는 주로 직장인 고객을 상대해야 한다. 은행으로서는 고객들을 내쫓을 수 없지 않냐. 설사 숨을 돌릴 수 있다지만, 옆 선배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후배가 먼저 자리를 뜨기 어렵다.” 수영 씨가 하루종일 배를 곯는 이유다. 실제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설문조사에 따르면 은행원 점심시간 1시간 사용 비율은 26%에 불과했다.
또 다른 은행 개인사업자 대출부서 김동현(가명·33) 씨의 사정도 비슷했다. 은행 대부분이 ‘주 52시간제’를 조기 도입하겠다고 외치지만, 꿈 같은 일이다. 일찍이 ‘PC 오프제’를 시행했지만 컴퓨터 화면이 꺼진 뒤에도 근무는 계속된다. 카카오톡과 전화 등 업무 연락이 이어진다. 야근하겠다고 결재를 받기도 쉽지 않다. 동현 씨는 “야근했다고 당당히 직속 상관인 부서장에게 보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그런 사람은 굉장히 용감한 직원일 것 같다. 나는 못할 것 같다”며 멋쩍게 웃었다.
“은행원은 일하는 만큼 (고액의) 연봉을 많이 받지 않느냐.” 은행 고위 관계자의 말이다. 돈을 많이 받으니 쉬는 시간 없이 이어지는 야근을 참고 견디라고 한다. 은행은 포괄임금제를 적용하는 대표적인 곳이다. 포괄임금제는 연장·야간근무 등 시간 외 근무수당을 일괄적으로 급여에 포함하기 때문에 과도한 노동이 이뤄지기 쉽다. 2016년 한국노동연구원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포괄임금제를 시행하는 기업의 노동시간이 그렇지 않은 곳보다 월 3시간가량 길었다.
◇숨통 조이는 실적 압박 =올해 초 A시중은행 지점장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우수거래고객(VIP)과의 술자리에서 불상사가 발행했다. 새로운 지점으로 발령받자마자 주요 VIP 고객이 주거래은행을 바꾸겠다고 통보했다. 지점장 입장에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영업 실적에 큰 타격이 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VIP 고객을 설득하려 점심부터 술을 한 잔 기울였다. 체질적으로 술을 입에도 대지 못했지만, 고객이 주는 술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게 빈병이 늘어나자 쓰러진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은행은 VIP 고객을 붙잡았지만, 그는 목숨을 잃었다. 또 다른 한 명은 과로로 숨졌다. 올 상반기(1~6월) 순이익 1조 원을 넘은 은행들의 어두운 이면이다.
과도한 실적주의는 직원들의 목을 조른다. 은행은 전 사원이 영업 담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장 분기·반기·연간 실적이라는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한 시중은행 전직 지점장은 “한번은 본부장이 아침에 다같이 설렁탕을 먹자고 해서 갔다. 그런데 식사가 끝나가자 불만을 표출했다. ‘일본 사무라이들은 실적이 안 좋으면 접시에 코를 박고 죽는다. 그 월급 받고 살기 부끄럽지 않냐.’ 이렇게 몇 번 당하면 나쁜 생각마저 든다” 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노조는 단기 성과를 목표로 한 ‘핵심성과지표(Key Performance Indicator·KPI)’를 직접적인 실적 압박 카드로 지목했다. KPI는 은행 직원 성과를 평가하는 핵심 지표다. 통상 매년 초 KPI를 기초로 지점과 본부급에 성과급을 준다. 은행마다 100~1000개 항목으로 구성된다. 한국금융연구원(KIF)이 2월 발간한 ‘국내은행의 영업점 성과평가 방향성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보면 국내은행 영업점 평가항목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이 수익성(54.0%) 항목이다. 고객유치(19.0%)와 여수신 규모(13.9%) 항목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단기 성과 항목에 86% 넘게 치중돼 있는 것이다.
전직 지점장은 “본점에서 제시하는 목표가 평상시 노력으로 달성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라며 “죽을 둥 살 둥 노력해야 가능한 목표를 주고 달성하게 한다”고 했다. 지점은 물론 개인별 손익 목표도 제시해 직원을 압박한다. 매달 실시하는 ‘1일 1펀드 권유’ 등 캠페인도 스트레스다. 급한 불을 끄려 온 가족을 동원해 법까지 어겨가며 팩스나 모바일 등으로 상품에 가입하는 것은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한다.
이러한 KPI 체계는 업계 ‘과당경쟁’으로 이어진다. 직원뿐만 아니라 고객도 피해를 본다. 고객에게 유리한 상품이 아닌 은행 수익이 많이 나는 상품을 판매하는 등 불완전판매 가능성이 크다. 실제 지난해 7월 금융노조 KPI 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은행원 10명 중 9명은 고객 이익보다 실적에 도움 되는 상품을 판매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장기적으로 은행 건전성과 신뢰도를 깎아 먹는다는 비판이 나온다. 은행의 한 관계자는 “KPI가 문제인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은행도 돈을 벌어야 하는 하나의 기업”이라며 딜레마에 빠진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CEO 위한 ‘리딩뱅크’ 경쟁? =업계 1위를 둘러싼 이른바 ‘리딩뱅크’ 경쟁은 은행의 단기 실적주의를 심화시킨다. 주요 은행들은 하나같이 “리딩뱅크가 되겠다”는 포부를 드러낸다. 또는 ‘글로벌 일류 은행’, ‘아시아 지역 최고 은행’ 등 거창한 목표를 내세운다.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 평균 임기는 2~3년이다. 이사회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연임에 성공하는 것이 은행장의 최대 목표다. 짧은 임기 안에 성과를 내 인정받으려다 보니 실적에 집착하는 구조가 됐다. 실제 올해 상반기 성과는 대단했다. KB국민·신한·KEB하나·NH농협은행 등 5대 시중은행 상반기 이자이익 총합이 12조 원을 훌쩍 넘었다.
하지만 정작 직원들은 “누구를 위한 리딩뱅크 경쟁이냐”고 입을 모은다. CEO의 욕심은 고스란히 직원들에게 전달된다. 위에서 아래로 실적 압박이 계속되는 셈이다. 금산노조 관계자는 “시장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해서 실적만 쌓아가는 관행은 고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상혁 노무사는 “은행 직원은 근로조건이 열악한 다른 노동자들에 비해 현장 분위기나 임금 수준이 좋기 때문에 문제가 있어도 말하기가 쉽지 않다”며 “해고나 징계를 받아야 문제를 제기하고 웬만한 것들은 참고 돈으로 극복하려는 문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새하 기자 shys0536@
김보름 기자 fullmoon@
곽진산 기자 jins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