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의심했다. 속수무책 가라앉는 세월호를 보며, 끔찍할 만큼 순진한 대통령을 보며, 이게 현실일까 하고. 자고 일어나면 꿈보다 더 리얼한 뉴스가 쏟아졌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와 상식적인 나라, 평범한 일상을 돌려 달라고 나서야 했다.
여기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웹툰이 있다. 육체와 영혼의 분리, 초능력, 육신을 이용한 로봇 등 판타지 요소가 가득하지만 주인공 이창이 사는 세계와 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은 마치 어제 잠들기 전 본 뉴스인 양 기시감이 든다.
조지 오웰은 흰 수퇘지와 개, 말 등 우화를 통해 독재와 사회주의에 일격을 가했다. 이른바 ‘정치적 글쓰기’로 소설에서 저널리즘을 구현했다면, 웹툰 ‘파리대왕’은 비디오 저널리즘에 가깝다고 평가할 만하다. 세월호나 용산참사는 물론 5·18 광주민주화운동까지 직접적으로 웹툰에 거론되진 않지만 촘촘히 배경 장면을 그려 넣은 시대극처럼 장면 곳곳에 묻어난다.
15일 작가 워커(유현석)를 서울 홍대입구역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당초 웹툰 매니지먼트에서 제공하던 작가들의 작업 공간에서 인터뷰를 진행할 계획이었지만, KT가 웹툰 플랫폼 ‘케이툰’의 수익 부진을 이유로 운영비를 축소하면서 공간마저 철수하게 됐다.
2014년 3월 8일 연재를 시작해 올해 4월 28일에 마쳤다. 웹툰이 뉴스처럼 현재 한국 사회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2012년쯤부터 1~2년 정도 작품을 구상했다. 땅과 건물, 자원 등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한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판타지물로 그려 내는 게 목표였다. 그런데 연재 한 달 만에 세월호가 침몰했고 이듬해엔 ‘최순실 게이트’가 터졌다. 정권도 바뀌었다. 처음 기획에서 10분의 1 정도만 빼고 모두 갈아엎었다. 우리 사회가 흘러온 방향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연재를 시작하자마자 그간 곪았던 사건들이 터지는 모양새였다. 작품으로 세월호나 용산참사 등을 이야기하려면 누가 잘했고, 잘못했냐의 수준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예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세팅을 새로 한 것이다.”
- 판타지물인데 생생한 인물 설정과 대사들이 인상적이다. 글로벌 대기업 ‘루트’사의 총수인 고도는 극 초반엔 그저 냉철한 경영자 정도로 묘사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폭주한다(극 중 루트사는 세계를 전쟁터로 만들고 유일한 방어책 역할을 맡기 위해 한 도시를 통째로 날리는 실험을 진행한다. 실험의 여파로 초능력자가 된 주인공 ‘이창’이 모든 죄를 뒤집어쓴다.)
“재벌에 대해 마냥 부정적으로 생각해 그러한 설정을 한 것은 아니다. 최규석 작가의 작품 ‘송곳’에는 ‘서는 곳이 달라지면 보는 것도 달라진다’는 말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서 있는 위치가 달라지면 그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고도’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극 초반에는 고도가 생각한 대로 세상이 움직이니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자기가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하나둘씩 어긋나면서 유아기적인 미성숙함을 드러내게 된다. 누구를 탓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이창을 문제의 원인으로 저격하고 탓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 연재가 마무리될 무렵 정권이 교체됐고, 최근엔 미투(Me too) 운동이 커지면서 수십 년간 묵혔던 고발들이 튀어나오고 있다. 작품의 결말도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를 반영했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조심스럽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파리대왕’ 2부와 3부도 준비 중이다. 단순한 정권의 교체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권력이 바뀌는 차원의 이야기를 그려야 할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됐지만, 그 과정에서 소수자 인권과 젠더 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고 얼버무려진 상태다. 실타래가 풀려 가는 것을 충실히 지켜보고 쓰는 것이 작가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첨언하자면, 페미니즘이나 젠더 문제에 대해서는 그림으로 그릴 때 최대한 종전에 가졌던 편견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예를 들면, 남성으로 표현된 이창이나 여성 캐릭터인 구원영을 설정하고 그릴 때도 특별히 젠더가 정해져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창은 혼혈에 장애를 가진 인물이고, 구원영은 전투 현장에서 남성들을 통제하는 사령관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마녀처럼 취급된다. 이런 식으로 캐릭터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즐겁다.”
- 철저히 개인이었던 주인공들이 연대하면서 거대 악과 싸우는 웹툰을 마치자마자 현실에서 비슷한 일을 겪고 있다. 웹툰 플랫폼 케이툰을 운영하는 KT가 운영비를 축소하면서 작가들에게 7월부터 원고료를 줄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고료 없이 유료화 수익만 지급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런 중대한 사안을 KT나 매니지먼트사인 투니드에서 직접 통보받지 못하고 동료 작가를 통해 들은 분들도 있다. 얼마 전 레진코믹스에서 비슷한 일을 겪고 케이툰으로 넘어온 작가들은 더욱 큰 충격에 빠져 있다. 급하게 작가 연대 회의를 꾸려 대응하고 있지만 프리랜서인 작가들은 사실상 구조조정을 당한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다. 작가들에겐 생존의 문제다. 현재로서는 KT와 매니지먼트사인 투니드의 협상이 원만히 마무리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