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진의 만년필이야기] 18. 여왕 폐하의 자주색 필기구

입력 2018-06-15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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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6월 12일, 전 세계로 생중계되는 방송은 두 정상이 열고 나올 커다란 밤색 문과 기다란 갈색 탁자를 보여주고 있었다. 갈색 탁자엔 똑같은 펜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클로스업된 화면을 보니 트럼프 대통령의 사인이 있는 것으로 봐선 미국이 준비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 오바마 대통령이 즐겨 사용했던 크로쓰사(社)의 수성 펜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아주 짙고 굵게 써지는 펠트 팁의 일종인 사피(Sharpie 3001)라는 이름의 샌포드사(社)의 마커를 자주 사용한다. 탁자에 있는 것은 이 마커이다. 짙고 굵게 써지는 것이 트럼프 대통령의 성향과 기호(嗜好)에 맞았기 때문이다.

미국이 준비한 그 두 개의 펜이 보이는 화면은 정지된 것처럼 꽤나 오래 잡혀 있었다. 커다란 밤색 문이 열렸고 두 정상은 합의문에 서명하기 시작했는데,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이 준비한 펜을 잡지 않았다. 대신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서명했던 펜과 같은 것으로 서명했다. 몽블랑 만년필이라고 오보가 많았던 사인펜의 일종인 그 펜이었다. 보통 방명록 등은 준비된 것을 쓰기 마련인데, 김 위원장도 자기 펜을 고집하는 자기 스타일이 있는 것이다.

영국의 찰스 왕세자도 주최 측이 준비한 펜보다는 자기 만년필로 서명하는 편이다. 왕세자는 서명에 앞서 정장 윗도리 오른쪽 포켓에서 왼손으로 만년필을 꺼내 오른손으로 서명한다. 예전엔 은으로 만들어진 파커 프리미어를 사용했지만, 최근엔 역시 은으로 만든 몽블랑 146을 늘 사용한다.

그러면 그의 어머니, 최근에 92세 생일을 맞은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도 자기 만년필이 있는 것일까? 자료 사진을 보면 여왕은 서명에 꼭 자기 만년필을 고집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주최 측이 몽블랑 149를 준비하면 몽블랑 149로, 워터맨 엑스퍼트면 워터맨 엑스퍼트를 사용한다.

하지만 여왕도 자기 만년필이 분명히 있다. 이렇게 단정할 수 있는 것은 2016년에 개최된 어떤 행사에서 여왕이 자주색 파커51로 서명했기 때문이다. 자주색은 오래전부터 왕권을 상징하는 색이다. 수수한 파커51은 단순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을 좋아하는 여왕의 취향엔 딱 맞는 것이었다.

▲만년필로 글씨를 쓰는 20세 때의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 6년 전이다.
▲만년필로 글씨를 쓰는 20세 때의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 6년 전이다.
한편 주최 측이 파커51을 준비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파커51은 공식적으로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78년 생산이 중지되었고 숨어 있는 펜촉 때문에 사용한 경험이 없으면 제대로 잡고 쓸 수 없다. 그 자주색 만년필은 여왕의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여왕이 1946년에 만년필을 쓰는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의 만년필 역시 파커51이다. 파커51을 들고 있는 사진은 1950년대, 1960년대에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1992년 BBC가 만든 다큐멘터리에서도 여왕이 자주색 파커51로 집무실에서 서명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만년필을 잡은 여왕만의 스타일이다. 여왕은 곧잘 만년필의 뚜껑을 꽂을 때 클립이 자기 쪽으로 향하게 꽂는다. 보통은 이와 반대인데 말이다. 1946년의 사진에도, 2016년의 사진에도 클립은 여왕 쪽으로 향하고 있다. 자주색 파카51에 뚜껑을 내 쪽으로 꽂는 게 여왕의 스타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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