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찬의 골프이야기] ‘캐디’로 골프 접한 구옥희 선수, 1988년 한국인 최초 LPGA 우승

입력 2018-05-25 11:12 수정 2018-05-2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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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서울 강남구 그랜드 인터컨티넨탈서울 파르나스 호텔에서 열린 KLPGA 창립 40주년 기념식에서 김상열(왼쪽 여섯 번째) KLPGA 회장과 박세리 프로 등 내빈들이 기념 떡 케이크를 자르며 기념촬영하고 있다.  사진제공 KLPGA
▲14일 서울 강남구 그랜드 인터컨티넨탈서울 파르나스 호텔에서 열린 KLPGA 창립 40주년 기념식에서 김상열(왼쪽 여섯 번째) KLPGA 회장과 박세리 프로 등 내빈들이 기념 떡 케이크를 자르며 기념촬영하고 있다. 사진제공 KLPGA

“내 골프채요? 연습할 때는 남자 채 하프세트로, 테스트에 나올 때는 지인의 사모님 클럽을 빌려서 나왔죠.”

40년 전인 1978년의 이야기다. 한국여자프로골프의 열악한 환경을 이야기해 주는 대목이다.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지금이야 널린 게 골프화이지만, 이것도 없어 남의 것을 빌려 신고 대회에 나가는 선수도 있었다.

최고의 빅스타군을 갖고 있는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가 오늘날 세계 3대 투어로 우뚝 서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시절이었다. 골프는 사실 그 나라의 국가 경제력이나 경쟁력과 맞물린다. 골프선진국을 보면 대개 강국이자 경제대국이다.

1970년대만 해도 한국은 박정희 정부의 유신 체제 속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 오로지 경제성장과 새마을운동으로 잘사는 나라가 목표였다. 사실은 배고픈 시절이었다. 1970년대 말까지 개장한 전국 골프장 수는 겨우 16개에 불과했다. 골프를 즐기는 인구도 그리 많지 않았다. 경제가 이런 상황에서 직업으로 골프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꿈을 카워가고 있었다. 바로 ‘캐디’ 종사자들이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아르바이트로 캐디를 하면서 골프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맹모삼천지교’처럼 주변 환경이 교육이 된 셈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 도심의 골프연습장에 캐디가 있었다. 볼이 자동으로 나오지 않았던 때여서 캐디가 낚시의자에 앉아서 일일이 볼을 티펙 위에 올려 주었던 것이다.

여자프로가 등장한 것은 1978년 5월. 경기 남양주시 레이크우드 컨트리클럽(구 로얄)에서 제1회 여자프로 테스트가 열렸다. 단독이 아닌 1968년 설립된 한국프로골프협회(KPGA)가 주관하는 제9회 프로월례경기에 끼어 테스트를 했다. 이 시절에는 남자대회도 변변한 것이 없었다. 월례경기에서 여자프로는 남자 경기 조의 뒤로 나가 프로 테스트를 받았다.

여자프로가 되기 위해 모인 선수는 모두 13명. 이틀간 실시된 테스트에서 4명의 선수가 프로 테스트를 통과했다. 현재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는 강춘자를 비롯해 한명현, 구옥희, 안종현 등이다.

강 부회장이 155타로 1위를 차지했다. 한명현과 구옥희가 1타 차로 공동 2위, 안종현은 4위였다. 이 때문에 강 부회장이 한국여자프로골프 1호가 됐다. 강 부회장을 제외하고 3명은 작고했다. 그리고 8월에 한원컨트리클럽(구 오산)에서 열린 테스트에서 김성희, 배성순, 이귀남, 고용학 등 4명이 합격해 여자프로는 8명으로 늘었다. 이때 남자프로는 80명이었다.

프로가 늘면서 대회도 열렸다. 하지만 늘 ‘쪽방’ 신세를 면치 못했다. 남자대회에 끼어 10개 대회를 치렀다.

첫 대회는 KPGA 한장상 전 회장이 스폰을 받아 만들어 준 총상금 50만 원의 한장상배 코리아 레이디스 오픈이었다. 강춘자가 우승했다. 이후 총상금은 남자대회의 10% 수준인 100만 원 정도였다.

KLPGA 초대 회장을 맡은 김성희가 여자프로부 부장을 맡았다. ‘한 지붕 두 가족’ 살림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10년 뒤 김성희 회장과 여자프로들의 노력으로 협회가 창설됐다. 김성희 회장이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도움으로 박철언 당시 체육부 장관을 만나 사단법인 설립 허가를 받아냈다. 회원 수가 50명으로 늘어난 1988년 12월 총회를 열어 KLPGA가 창립됐다. ‘더부살이’였던 KLPGA 투어가 전 세계 그린을 움직이는 내로라하는 선수들을 보유한 ‘빅하우스’가 되기 위한 첫 출발점이었다.

26일이면 여자프로골프 태동 40주년을 맞는다. 협회 창립은 30년이 채 안 된다.

대회가 많은 일본으로 눈을 돌린 것은 협회 설립이 되기 전이다. 재일교포가 가교 역할을 해 초창기 프로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한명현이 1983년 4월 일본여자프로골프협회(JLPGA) 프로 테스트를 통과한 데 이어 3개월 동안의 현지 적응 기간을 거쳐 7월 마침내 일본프로 자격증을 획득했다. 한명현은 한국 여자프로 골퍼 중 최초로 해외 프로 골프 선수 자격을 따낸 선수다. 뒤이어 구옥희와 강춘자가 프로 테스트를 통과했다.

미국의 물꼬를 튼 선수는 구옥희다. 경기 고양에 있는 123골프장에서 캐디를 하면서 골프와 접한 구옥희는 일본으로 건너가 1984년 첫 우승에 이어 이듬해 3승을 올린 뒤 미국으로 직행해 프로 자격을 획득했다. 일본과 미국 투어를 병행하던 구옥희는 1988년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문밸리 골프코스에서 열린 LPGA투어 스탠더드 레지스터오픈에서 우승했다. 한국인 최초의 LPGA투어 우승이다.

총상금 1억 원 시대를 연 것은 1990년. 경기도 고양 뉴코리아 컨트리클럽에서 한화그룹이 주최한 제1회 서울여자오픈의 총상금이 30만 달러였다. 이 대회와 함께 1993년 동일레나운클래식과 FILA오픈 등 각종 국내 대회 총상금 1억 원 시대의 문을 열었다. 한국 골프사에 한 획을 그은 박세리(41)와 김미현(41)이 등장한 것은 1996년 4월. 함께 KLPGA에 입회했다.

박세리는 1992년 KLPGA 투어에서 아마추어로서 첫 승을 올리며 ‘거인’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1995년 KLPGA 투어 12개 대회에서 4승을 거뒀고, 1996년 KLPGA 투어 상금왕을 차지했다. 박세리는 1998년 미국에 진출해 5월 LPGA 투어 맥도널드챔피언십에서 첫 승에 이어 LPGA 투어 메이저대회 US여자오픈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US여자오픈에서 20홀 연장이라는 진땀 나는 레이스를 벌인 박세리는 마지막 홀에서 양말을 벗었다. 워터해저드에 들어가 경사면 러프에 걸린 볼을 쳐내 승리로 이끌었다. 우리 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을 ‘맨발 투혼’이었다. 당시 IMF 외환위기로 고통받던 국민들은 생생한 그 장면을 보며 큰 용기와 희망을 얻었다. 박세리는 1998년에만 LPGA 투어 4승을 거두며 한국 선수 최초로 LPGA 신인왕을 수상했다.

이어 1999년 김미현이 LPGA 신인상을 수상해 한국여자프로는 2년 연속 신인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LPGA투어 통산 25승의 박세리와 1999년 LPGA 투어에 진출해 8승을 거둔 김미현이 한동안 LPGA 무대를 평정했다. 지금은 둘 다 은퇴했다. 박세리는 SBS골프 해설가로, 김미현은 연습장을 운영하며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한국여자프로의 강인한 DNA는 후배들이 이어받았다. ‘세리키즈’ 박인비(30·KB금융그룹)가 2015년 리우데자이네루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메이저대회 7승을 포함해 통산 19승을 올리며 세계여자골프랭킹 1위에 올라 있는 박인비는 LPGA투어에서 ‘골프 여제’로 군림하고 있다.

‘슈퍼스타’ 박성현(25·KEB금융그룹)은 지난해 미국으로 자리를 옮겨 메이저대회 US여자오픈에서 첫 우승을 했다. 그리고 1승을 더 추가해 2015년 김세영(25·미래에셋), 2016년 전인지(24·KB금융그룹)에 이어 신인상을 받았다. 특히 지난해 박성현은 유소연과 함께 올해의 선수상까지 획득했다. 올 시즌 미국에 진출한 ‘무서운 신인’ 고진영(23·하이트)이 가자마자 데뷔전에서 우승하는 쾌거를 이루며 67년의 LPGA투어 역사를 바꿨다.

일본에서는 2015년, 2016년 상금왕을 차지한 이보미(30·혼마)를 비롯해 신지애(30·스리본드), 김하늘(30·진로재팬)이 일본 무대를 휩쓸고 있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KLPGA투어 6관왕에 오른 ‘핫식스’ 이정은6(22·대방건설), ‘슈퍼루키’ 최혜진(19·롯데)이 돌풍을 일으키며 LPGA투어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글로벌 그린에서 ‘코리아’ 브랜드의 위상을 한껏 높이고 있는 한국 낭자들이 새로운 감동 드라마를 앞으로 어떻게 써 나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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