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임금도 먹고 싶어 했던 게탕.
조선의 제22대 임금 정조(正祖)는 정민시(鄭民始, 1745~1800)를 총애했다. 정민시는 세자 시절부터 정조를 보필했지만, 정조가 임금이 된 다음에도 자기 분수를 지켜 죽을 때까지 정조의 신임을 받았다. 홍국영이 정조의 총애를 받다가 이른 시기에 쫓겨나 울화병으로 죽은 것과 비교해보면, 정민시는 내공이 상당히 깊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유원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정민시가 어느 날 임금에게 음식 자랑을 했던 모양이다. 요즘 말로 번역하면, “상감마마, 제 처가의 게탕이 아주 끝내줍니다.” 그러자 정조가 정민시에게 처가의 게탕을 올리라고 명했다. 임금에게 올릴 게탕이니 오죽했겠는가. 사위의 부탁을 받은 장모는 정성을 다해 게탕을 끓였다.
그때 마침 외출했다가 돌아온 정민시의 장인 이창중(李昌中)은 온 집안에 퍼진 게탕 냄새를 맡고서 자초지종을 물었다. 임금에게 올릴 게탕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이창중은 게탕을 냅다 들어서 마당에 쏟아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사사로이 음식을 바치는 것은 남의 신하 된 자가 감히 해서는 안 될 일이오. 또 더구나 이른 가을에는 게의 성질이 사람에게 이롭지 못한 법이오.”
하는 수 없이 정민시는 그대로 정조에게 보고를 했다. 정조는 이창중의 말이 이치에 맞는 말이기는 해도 게탕을 맛보지 못한 게 몹시 아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창중을 골려주려고 재정 부서인 탁지(度支)의 낭관(郞官)에 제수하고는 그 이튿날에 곧바로 상황 보고를 하라고 명했다. 이창중은 밤을 새워 회계장부를 달달 외워 정조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했다. 정조는 결국 게탕도 먹지 못하고 이창중을 골려주는 데도 실패했던 것이다.
정조가 먹고 싶어 했지만 먹지 못한 게탕이 참게탕인지, 꽃게탕인지는 불분명하다. 요즘에는 게 하면 동해는 대게, 서해는 꽃게로 대별되지만, 농약 사용이 일반화되기 전까지는 민물 참게도 식탁에 자주 올랐던 음식이다. 참게는 전통적으로 게장과 탕으로 많이 먹었다.
1000만 달러의 수출효자 상품, 꽃게
꽃게가 한국인의 식탁에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이다. 봄철이면 서해 법성포에서부터 연평도까지 파시(波市)를 이루며 엄청나게 잡혔던 조기의 어획량이 점점 줄어들었다. 조기를 잡던 어선들이 하나둘 꽃게잡이로 전환하면서 꽃게는 서해안의 주요 수산물로 자리 잡게 된다. 하지만 꽃게를 활(活)게로 운송할 방법이 없었고, 냉동 시절도 변변찮았기 때문에 요즘처럼 전국적으로 유통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꽃게는 이 무렵부터 당시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따라 대일(對日) 수출이 활발하게 진행된다.
“꽃게는 달라를 벌기 위해 4월부터 비행기를 타게 된다. 어지간한 살림 형편으로는 타기 어려운 비행기를 꽃게가 이용하게 된 것은 일본까지 가는 도중에 많은 수가 죽어버려 수송이 늦었다간 제값을 못 받게 되는 때문이다. (중략) 지난해에는 82톤이 수출되어 십일만 오천 달라를 벌어왔는데 올해 목표는 이십일만 달라. 연간 2천 톤까지는 수출이 가능할 것으로 보여 꽃게의 증산을 위해 경기도 평택과 부천이 신규 주산(主産)단지로 선정돼 이미 작업이 진행 중이다. 그런데 이렇게 물고기들의 수출이 늘어나자 정부는 ‘생선 안 먹기 운동’을 더욱 전국적으로 벌일 계획. 한편 기쁘면서도 섭섭하달 수밖에 없다.”(1970년 3월 18일 동아일보 기사)
국내 소비를 줄여서까지 수출에 몰두하였던 꽃게는 요즘의 반도체 못지않게 당시로서는 수출 효자 종목이어서 비행기로 수송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10여 년 지나서 경향신문은 2회에 걸쳐 ‘메이드 인 코리아 100억불’이라는 꽃게 수출에 대한 전반적인 특집기사를 마련한다. 이 기사를 요약하면 꽃게는 어민들에게까지 천대받았던 수산물이었고, 고작 일식 음식점 정도에 수요가 있었지만 1969년부터 대일 수출이 열리면서 꽃게 어획량은 획기적으로 늘어 단일 품목으로 1000만 달러를 돌파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도 처음에는 냉동 수출이어서 제값을 받지 못했기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수출업자들은 획기적인 꽃게 보관과 수송 방법을 개발했다. 바로 얼음물로 꽃게를 기절시켜서 톱밥에 섞어 스티로폼 상자에 담는 방법을 발명(?)한 것이다. 이렇게 꽃게 수출이 늘어나 물량이 모자라자 정부 당국은 국내 소비를 규제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역으로 꽃게 국내 가격이 상승했다. 때문에 일부 업자들이 내수(內需)로 빼돌려 수출에 지장을 받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1977년 5월 17일, 19일 경향신문 기사)
꽃게 수출 활성화로 인한 꽃게 자원의 감소도 그 당시 이미 대두되었기에 정부는 7월과 8월 금어기를 정하기도 했다. 이 금어기는 지역 바다 사정에 맞추어 현재는 6월 21일부터 8월 20일까지로 정해져 있다(연평도 지역은 7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남획을 우려하면서까지 수출에 몰두했던 꽃게는 1980년대 이후 국내 소비가 확대되면서 전량 국내 소비로 전환된다. 최근에는 연안 꽃게만으로는 국내 수요에 미치지 못해 중국, 베트남, 중동 등에서 대량으로 수입하기에 이르렀다.
게장, 게국지, 게찜으로 포식하다
한때는 수출의 역군이었던 꽃게를 맛보기 위해 충남 안면도 백사장항으로 간다. 홍성에서 천수만 방조제를 지나자마자 게국지와 게장 간판이 달린 음식점이 즐비하다. 도착한 곳은 서산이 고향인 한 낚시꾼에게 소개받은 ‘등대횟집’(041-673-2215, 대표 고종수). 게국지와 간장게장과 게찜을 주문한다. 봄철은 산란을 앞둔 암게가 속이 꽉 차는 계절이다. 수게에 비해 암게가 서너 배 가격이 비싸다. 수게는 가을철에 살이 들어차 찜용으로 적합하다고 한다.
먼저 간장게장과 게국지가 나온다. 간장게장이야 말이 필요 없는 밥도둑. 노란 장이 먼저 시각을 자극한다. 먼저 국물을 먹어보니 약간 비릿하면서도 맛있는 짠맛이 난다. 그래, 바로 이 맛이다. 게 간장에 밥 한 숟가락을 비벼 노란 게장과 버무려 입으로 가져간다. 그냥 꿀꺽꿀꺽 넘어간다. 게장이야 요즘은 거의 냉동 꽃게로 담기에 사실 서울이나 서산이나 안면도나 잘하는 집은 다 맛있다. 하지만 맛은 분위기에도 좌우된다. 스멀스멀 접근한 해무(海霧)가 바다와 하늘을 무채색으로 만든 몽환적인 풍경을 보면서 먹는 음식 맛도 각별하다.
게국지는 서산이나 태안 지방의 토속 음식이라 한다. 배추가 들어가 있는 게탕이다. 원래는 김장할 때 남은 우거지나 시래기를 절여 두었다가 게장 남은 것과 함께 끓여 먹었다고 하는 음식인데, 토속적인 게국지를 하는 집은 드물다고 한다. 무엇보다 비린 맛이어서 어릴 때부터 먹지 않은 사람은 먹기 힘들다고 한다. 요즘 태안이나 안면도 어느 집이나 배추를 넣어 시원한 맛을 강조한 게탕 비슷한 게국지를 내놓는단다. 게탕은 된장을 넣어 간을 맞추고 비린 맛을 없앤다면, 게국지는 새우젓으로 간을 한다는 점이 게탕과 게국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게국지 속에 있는 꽃게를 꺼내 발라먹으면서 가끔씩 국물을 떠먹는다. 국물에는 농후한 시원함이 느껴진다.
영덕게도 그렇지만 꽃게도 술 마실 시간을 주지 않는다. 술꾼들이 모여 앉아 있어도 술잔을 기울이는 속도는 현저히 느리다. 체면 무시하고 손가락을 쪽쪽 빨아가며 게를 발라먹느라고 술잔을 기울일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이다. 선주후식(先酒後食)이라 했거늘, 게장에 밥을 비벼 먹었으니 술이 들어갈 배가 더욱 없다. 이때 게찜이 나온다. 하지만 이미 배에는 더 들어갈 공간이 없다. 조금 먹다가 포기한다. 그것만으로도 포식이다. 결국 게찜은 싸 달라고 한다. 해무 가득한 바닷가에서 한참을 노닐다가 배가 꺼질 때쯤이면 본격적으로 안주로 삼기 위함이다. 고려의 대시인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게찜을 먹으며[食蒸蟹]’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필랑은 술 마시는 것 즐기느라 다른 생각없고/ 다만 게를 안주 삼아 한평생 보내고자 하는 것을 (중략) 삶아서 단단한 붉은 껍질 쪼개보니/ 노란 살과 푸른 즙이 반쯤 섞여 있구나…”
얼마나 게를 좋아했으면 이런 시를 남겼을까. 게를 안주 삼아 평생을 보내지는 못하겠지만 몇 시간이라도 바닷가에서 게찜과 맑은 술을 즐길 수는 있다. 남은 밤 시간은 이규보의 흉내 내기다.
문학평론가·(사)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