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이 채용비리 문제로 신뢰성 타격을 받고 있지만 상반기 내 마련될 ‘은행권 채용 모범규준’에는 부정 입사자 제재나 피해자 구제 등 채용비리 사후조치들이 반영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은행권은 채용의 자율성 등을 이유로, 임원추천제 근절 방안을 모범규준에 담는 것을 꺼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12일 금융권에 따르면 은행연합회는 은행 8곳(국민·신한·KEB하나·우리·씨티·SC제일·농협·부산) 인사담당 실무자들과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은행권 채용 모범규준’ 마련을 위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모범규준은 초안은 다음달 초, 최종안은 6월 말에 나올 예정이다. 모범규준이 제정된 뒤엔 각 은행이 개별 내규에 이를 반영하게 된다.
하지만 임원추천제 근절 방안이나 피해자 구제 조치 등 채용비리를 막을 실질적인 대책들이 모범규준에 반영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TF 회의에 참여하는 한 은행 관계자는 “피해자 구제를 하려면 예비합격자 1번, 2번씩으로 탈락자에게 순번을 부여해야 하는데, 개인정보보호법상 일정 기간 후엔 탈락자 서류를 폐기해야 한다”며 “법적인 문제 등으로 피해자 구제는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말했다. ‘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채용절차법)’과 ‘개인정보 보호법’에 따르면 회사가 탈락자의 서류를 보관할 수 있는 기간은 채용 확정일로부터 최소 14일에서 최대 180일까지다. 이 기간이 지나면 개인정보 보호법에 따라 채용 서류를 파기해야 한다.
법원 최종 판결이 나와야 피해자와 비리 연루 임원·부정 합격자가 명확히 드러나는 만큼, 그 전까지 정황만으로 구제하기 힘들다는 목소리도 있다. 남궁주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는 “사기업은 공기업과 달리 청탁자를 징계한다거나 부정 채용자를 떨어뜨린다거나 피해자를 합격시키는 부분은 주저할 수 있다”며 “(법원 판결 전에) 은행들이 피해자 구제 등을 하면 채용비리를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TF 회의에서는 그간 채용비리 문제의 핵심 쟁점이 돼 왔던 임원추천제, 성차별 고용 관행에 대해서도 적극 논의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TF참여 은행 관계자는 “그간 4차례 TF 회의에서 임원추천제 근절에 대한 이야기가 안 나왔다”며 “그건 모범규준이 아니더라도, 각 은행의 채용프로세스와 문화가 다른 만큼 은행이 알아서 반영하면 될 것”이라고 했다. TF는 앞선 채용비리 검사 당시 금감원에서 지적받은 사항(임원 자녀 가산점, 블라인드 미 운영, 내부통제 미흡)을 개선하는 수준의 큰 틀만 가닥을 잡은 상태다.
하지만 현 채용비리 문제의 심각성을 고려하면 피해자구제 방안 등 적극적인 대책들이 반영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병호 금융연구원 은행보험연구실 선임연구위원은 “모범규준에 임원추천제 폐지, 피해자구제방안, 청탁자 처벌 등도 명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며 “채용비리로 아웃되면, 대기자 리스트 1,2,3번이 들어가는 식으로 처리하면 좋지 않겠냐”고 말했다. 이어 그는 “부정청탁 관련자 처벌 규정도 담으면 선례가 남아 일벌백계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