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소설과 영화 등에 감동한다. 하지만 그 감동에 이르기까지 발단과 전개라는 과정을 지나와야 한다. 그러나 스포츠는 다르다. 그 자체가 클라이맥스다. 따라서 감동도 생생하고 극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니 ‘직관’을 못 한다면 ‘본방사수’다.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이 그랬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말이 있다. 학교 체육시간에 많이 들었던 표어다. 태권도장이나 체육관이라면 대개 붙어 있기도 했다. 그런데 이 말이 오역이란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까지 깃든다면 바람직할 것이다’가 정확한 해석이라는 것. 시인 유베날리스의 풍자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유베날리스가 살았던 2세기 초, 로마에서 검투경기는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였다. 검투사들이 근육을 뽐내며 칼을 휘두를 때마다 관중은 열광했다. 검투 경기에 열광하는 로마 시민들, 검투사의 건강한 육체를 선망하는 청년들의 행태에 유베날리스는 한 줄 풍자를 던졌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기를 바라노라.”
근대 올림픽은 1881년 독일인 쿠르티우스(Ernst Curtius)가 그리스 올림피아 유적지를 발굴하면서 시작되었다. 유적지 발굴에 자극받은 프랑스인 쿠베르탱이 올림픽 부활을 주장한다. 올림피아 경기 부활의 구상을 발표하고 유럽 각국의 동의를 얻어 결국 1896년 제1회 대회를 그리스에서 개최한다.
쿠베르탱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교육학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으로 간다. 영국 유학 중에 ‘워털루에서 영국군이 승리한 것은 이튼 교정에서 꽃핀 스포츠정신 덕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팀플레이로 표현되는 공동체 정신이 청소년 교육으로 적합하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동계올림픽 스케이팅에 ‘팀추월’이라는 단체 종목이 있다. 단체 경기인 만큼 마지막 선수의 결승선 통과 시간이 팀의 기록이 된다. 바람의 저항을 덜 받기 위해 세 선수는 동작을 하나처럼 같이한다. 마치 한 선수의 복사본 같다. 교대로 선두에서 이끌고 뒤처지는 선수는 가운데 넣어 보조를 같이한다. 공동체가 되어 같이 달리는 것이다. 그래서 올림픽 정신이 가장 잘 깃든 종목으로 일컫는다.
그런데 우리 여자 국가대표 선수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트랙을 2바퀴, 700m 정도 남겨두고 선두에서 이끌던 노선영 선수가 뒤로 빠지고 로테이션으로 김보름 선수가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김보름, 박지우 두 선수가 지친 노선영 선수를 내팽개치고 질주해 버렸다. 뒤처져 있던 노선영 선수는 공기 저항을 받게 되니 더 처질 수밖에.
국내 언론과 방송이 이를 집중 보도하면서 국민의 비난이 폭주했다. 해외 언론도 그냥 눈감지 않았다. 캐나다의 한 신문은 “올림픽의 가장 실망스러운 장면’이라며 “한국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들이 동료를 배신하는 실망스러운 장면을 연출했다”고 꼬집었다. 뉴욕포스트는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여자팀에서는 어떤 팀워크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동료를 버린 것은 공동체를 버린 것이다. 공동체가 없다면 메달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개인 경기에 환호한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체 경기에 더 감동한다. 희생하고 협력하는 팀플레이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개인주의가 팽창 중인 요즈음,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들이 공동체 정신을 잘 보여주었다. 정면(正面)으로, 그리고 반면(反面)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