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자유무역 질서가 하루아침에 두 갈래로 찢어지게 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아메리카퍼스트’에 바탕을 둔 보호무역주의가 그 방점을 찍는 날 11개국이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일명 ‘TPP11’에 서명하면서 자유무역 수호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7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8일 철강에 25%, 알루미늄에 10%의 관세를 각각 부과하는 명령에 서명한다. 그는 관련 업계 근로자들을 초청해 미국 산업을 보호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고자 수입 제한을 실시한다는 것을 더욱 부각시킬 의도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미국을 제외한 TPP 참가국 11개국은 칠레 산티아고에서 새 무역협정인 TPP11에 서명할 예정이다.
트럼프는 일본과 캐나다 호주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 주요 국가들이 자유무역의 기치를 높이 들어 올린 날에 무역전쟁 선전포고를 강행하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철강·알루미늄 관세 부과 방침을 공식 발표한 시점도 주목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게리 콘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이 지난 6일 사임 의사를 밝히자마자 하루 만인 이날 관세안 서명 일정을 공개하는 등 속전속결로 일을 처리했다.
백악관에서 자유무역을 옹호하며 외로운 싸움을 펼쳤던 콘 위원장이 물러나면서 트럼프가 보호무역 정책을 더욱 거리낌 없이 펼치게 된 셈이다.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정책국장과 윌버 로스 상무장관 등 보호무역 ‘강경파’들이 더욱 위세를 떨치게 됐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오는 13일 펜실베이니아에서 열리는 연방 하원 보궐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이날을 택했다고 풀이했다. 펜실베이니아는 미국 철강산업의 중심지로 민주당의 아성이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중국 저가 철강제품의 공세 속에 쇠락해가는 철강산업에 고통을 받는 현지 민심을 공략해 지난 2016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아울러 미국은 오는 11월 하원의원 전원과 상원의원 3분의 1을 새로 뽑는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다. 이래저래 트럼프는 자신의 지지기반인 ‘러스트벨트(미국의 쇠락한 제조업 지역)’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은 미국을 동맹국 대부분으로부터 분리시킬 것이라고 WSJ는 지적했다. 미국과 소원해질 동맹국 중에는 TPP 11개 회원국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은 트럼프 전임자인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시절 TPP 회원국 간의 결속을 주도했으나 트럼프 시대로 들어서면서 오히려 대립하게 됐다.
칠레에서 서명식을 가진 것도 의미가 있다. 일본이 TPP11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서명식을 굳이 칠레에 넘겼던 것은 트럼프의 보호무역에 대항해 자유무역의 울타리를 조기에 치겠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풀이했다.
당초 캐나다는 조기 서명에 미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TPP는 스티븐 하퍼 전 캐나다 총리의 업적이었기 때문에 쥐스탱 트뤼도 현 정부 입장에서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그러자 일본은 11일 임기가 만료되는 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이 마지막 업적으로 TPP11을 과시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칠레에 서명식을 내줬다. 이 모든 것은 내년 발효라는 최종 목표를 위한 것이다.
트럼프의 보호무역에 맞서 일본은 자국이 주도하는 TPP11이라는 전략적 카드를 손에 넣었다. 게다가 철강 관세로 보호주의가 뚜렷해지면서 TPP11이 자유무역의 상징으로 더욱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TPP 11개 회원국이 앞으로도 전략적인 시각으로 참여국을 늘려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과 대만을 포섭해야 아시아 경제질서를 주도하려는 중국을 견제하고 트럼프 보호무역에 맞서는 것이 가능해진다. 지리적으로 관련이 전혀 없는 영국도 유럽연합(EU) 탈퇴인 브렉시트 충격을 완화하고자 TPP 참여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여전히 미국은 양자 무역협정 카드로 TPP 참가국들을 흔들고 있고 중국도 자국을 중심으로 하는 무역블록 구축을 시도하고 있다. 세계 무역질서가 새롭게 구축되기 전까지 혼란은 더욱 심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