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설 준비로 한창 분주하던 그믐날 새벽, 사내아이도 아닌 계집아이가 태어났으니 내색은 크게 안 하셨지만 부모님의 실망이 적지 않으셨을 것 같다. 새털같이 많은 날 중에 하필이면 설날 하루 전날 태어난 나는, 오래도록 생일상을 받지 못한 채 컸다. 외조부모님에 친정 부모님까지 어르신들 모시고 사는 엄마 입장에선 설 준비만으로도 머리가 지끈지끈할 텐데, 딸자식 생일상 차릴 생각은 엄두조차 나지 않았을 게다.
뿐만 아니라 어인 연유인지 부모님은 나의 출생신고마저 차일피일 미루셨던 모양이다. 보다 못한 외할아버지께서 외손녀 출생 신고를 하러 가셨다니 말이다. 직접 동회(지금의 주민센터) 서기를 찾아가신 외할아버지, 당신 손녀가 2월 모모일 생이라 신고했더니 동회 서기가 “할아버지, 늦게 오셨네요. 벌금 내셔야 합니다” 하더란다. 벌금이 못내 아까웠던 외할아버지께선 “그럼 벌금 안 내도 되는 날에다 올려줘요”라고 부탁해 당신 손녀를 3월 10일생으로 등록하셨다고 한다.
그 후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는데 그만 문제가 생겼다. 만 일곱 살 되는 해 3월생부터 이듬해 2월생까지 나오는 입학통지서를 받지 못한 것이다. 원래는 2월생인 딸이 초등학교 입학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외할아버지의 실수로 ‘열흘 상관에’ 1년을 꿇어야 하는 건 억울(?)하다는 데 생각이 미친 엄마, 이번엔 직접 동회 서기를 찾아갔다고 한다. “이만저만 해서 사정이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 딸 생일 3월을 2월로 고쳐 달라”고 애원해서 ‘제 나이’에 나를 초등학교에 들여보냈다는 것이다.
중학교 때까지는 2월 10일 생으로 지내다 고등학교 올라갈 때 호적 생일을 되찾게 되었다. 지금 생각으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다. 동회 서기가 생년월일을 이리저리 바꿀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기야 예전 신생아 사망률이 높았던 시절엔 1~2년 출생 신고를 미루는 일은 흔했다 하니 내 경우는 약과인 셈이다.
올해도 3월 10일이 되면 이메일과 휴대폰을 통해 “고객님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고객님 사랑합니다.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고객님의 특별한 날을 기억합니다” “생일 특별 할인!” 등등의 메시지가 쌓일 것이다. 카카오 스토리를 열면 커다란 생일 케이크에 해피 버스데이 문구 위로 색색 종이가 날아다닐 것이고.
그래도 인생에는 늘 반전의 묘미가 있다지 않은가. 대학교수는 만 65세에 정년퇴임을 하는데, 공식 생일이 3월 10일인 나는 이번에도 ‘열흘 상관으로’ 친구들보다 한 학기나 더 근무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가짜 생일을 선물로 주신 외할아버지께 감사 인사라도 올려야 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