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어느 모녀의 착한 화투

입력 2018-02-22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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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딱 벗고 혼자 쳐도 본전이 안 맞는다.” 화투판에는 잃은 사람만 있다는 이야기이다. “비풍초똥팔삼”, 화투판에서 패가 꿀릴 때 버리는 순서이다. “삼고초려”, ‘스리고’를 부를 때는 상대의 ‘초단’을 조심하라는 의미이다. 못 먹어도 고(이판사판, 실패 가능성이 있더라도 강행한다), 유비무환(‘비’ 들고 있으면 ‘피박’ 염려 없다)….

화투판에서 통한다는 ‘격언들’(?)이 우스개로만 들리지 않는다. 오죽하면 화투판을 ‘인생의 축소판’이라고까지 말할까? 패를 던졌으면 다시 거둬들이지 못한다는 ‘낙장불입(落張不入)’은 “한 번의 실수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니 작은 일도 가볍게 하지 말라”는 뜻의 사자성어(四字成語)로 격상했다.

설날 성묘 후 들른 고향 시골의 마을회관은 시끌벅적했다. 남자 어르신들은 마당에서 윷놀이를 하고, 여자 어르신들은 따뜻한 방에서 화투를 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판에 들어오라는 어르신들의 권유에도 끼어들 수가 없었다. 나는 아쉽게도 월별로 그림을 맞춰 가져가는 민화투(늘화투)만 할 수 있는 초짜이기 때문이다. 육백, 다섯 장의 패 가운데 석 장으로 열 또는 스물을 만들고, 남은 두 장으로 땡 잡기를 하거나 끗수를 맞추어 많은 쪽이 이기는 짓고땡(지쿠탱·짓고땡이는 잘못), 섰다, 고스톱 등의 놀이 방식은 섭렵하지 못했다. 머리가 좋지 않은 데다 셈 또한 밝지 않으니 앞으로도 배우긴 힘들 것 같다.

“방석 밑에 있는 그 똥피는 뭐랴? 얼래, 이번 판은 파투여, 파투!” 담배를 재배하는 당숙모의 예리한 눈에 화투판이 정리가 되고 나서야 겨우 집안 어른들께 세배를 할 수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돈이 오고 가니 도박이다 뭐다 말이 많지만, 동전만 잔뜩 쌓인 분명 ‘십 원 내기’ 놀이이다. 고향 어르신들의 윷놀이, 화투 놀이는 대보름까지만 이어질 것이다. 봄볕에 얼었던 흙이 녹으면 마른 몸을 일으켜 들로, 논으로 나가 일을 하실 테니까.

그런데 화토/화투, 파토/파투 어느 것이 바른 말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화토’는 경상도와 제주도의 사투리로 화투가 표준어이다. ‘꽃들의 싸움’을 뜻하는 한자어 ‘花鬪’로, 말 그대로 꽃이 그려진 48장으로 된 놀이 딱지, 혹은 그것을 갖고 노는 오락을 말한다. 그러니 화투 놀이를 하다가 누군가 화투짝 한두 장을 숨겨 장수가 부족하거나 순서가 뒤바뀌어 판이 잘못됐을 땐 ‘파토’가 아니라 파투라고 해야 맞다. 파투는 일이 잘못되어 흐지부지된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도 많이 쓰인다.

화투판에선 잘못 쓰이는 말도 여럿이다. 그중 ‘꼬평’ ‘깨평’ ‘뽀찌’가 대표적이다. 모두 노름이나 내기 등에서 남이 가지게 된 몫에서 조금 얻는 ‘공것’을 뜻하는 말로 쓰이지만, 하나같이 어원이 정확하지 않은 잘못된 말이다. 개평만이 표준어이다. “개평을 뜯다” “개평을 떼다” 등으로 활용할 수 있다.

치매를 앓는 친정엄마를 요양병원에 모셨다는 지인은 주말마다 화투를 챙겨 병원에 간단다. 엄마의 기분을 좋게 해 줄 ‘돈 잃기’ 고스톱을 치기 위해서라고. “천 원 내기로 두세 시간 치고 나면 3만 원가량 딴 우리 엄마는 싱글벙글이에요. 늘 아프다던 팔과 다리도 힘있게 움직여요.” 그녀도, 화투도 효녀라는 생각을 했다.

정초에 중년의 효녀가 던진 한마디가 먹먹하지만 따뜻하게 가슴에 남아 있다. “집에 간다고 병원을 나설 때마다 화를 내던 엄마가 화투 놀이를 하고 나서부터는 웃으며 말해요. ‘아줌마, 차비에 보태 써’라고 화투로 딴 만 원짜리 한 장까지 챙겨 주면서요.” 착한 화투는 꽃 싸움이 아니라 꽃놀이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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