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했지만 즐거운 기억이 많은 시절이다. 3저 호황 덕분인지 올림픽을 앞둬서인지 당시엔 알 수 없었고 지금도 모른다. 죽마고우(竹馬故友) 다섯이 항상 어울려 놀았다. 같은 해 개봉한 ‘천녀유혼’을 보고 돌아오던 길에 친구 세 명이 고등학생 형들한테 이유 없이 두들겨 맞았다. 친구 하나는 코뼈까지 부러졌는데 적절히 조치하지 못해 여태 흔적이 남았다. 개성 넘치는 인상을 갖게 된 건 아이러니다.
코뼈가 부러진 친구는 바다 같은 인품을 가졌다. 그날 이후 녀석은 부정의에 맞닥뜨렸을 때 당장 도전할지, 충분히 힘을 기를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 묻곤 했다. 부당하게 가혹한 선생님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가 따귀도 맞았다. 꽤 높은 서열의 운동권이 된 녀석이 분신을 예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대 행정반에 주저앉아 오열한 기억이 있다. 다행히 살아서 가끔 산에 함께 가고 술도 마신다.
30년이 지났다. 백화점이 무너지고 다리가 끊어졌다. 흙수저 청년들은 ‘N포 세대’라 자조한다. 세 모녀가 월세를 담은 봉투를 남긴 채 자살했다. 가족을 죽인 독재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26년을 기다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2012년에 개봉했고, 2014년에는 대부분 어린 학생인 수백 명이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생방송 되는 화면 속에서 죽어 갔다. 혹한의 길바닥에 누운 노숙자들이 소주병을 안고 잠든다. 우리나라의 1인당 GDP는 3만 달러에 육박해 있지만 갈 길이 멀다.
코뼈가 부러졌다. 비중격까지 무너진 복합골절이다. 생각만큼 아프진 않은데 변형될 수 있고, 코 기능도 떨어질 수 있다기에 수술을 예약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모든 가능성의 불가능성으로서 죽음을 상정하고, 환대의 정신에 입각한 인간 회복의 윤리학을 설파했다. 입구는 타인의 얼굴이다. 부러진 코는 얼굴을 바꾸지만, 그 안의 인간을 없애지는 못한다. 1987년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가 인기리에 상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