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계만큼 청출어람(靑出於藍)이 당연시되는 분야도 드물지 않을까. 유망한 젊은 과학자들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국가 또는 민간 프로그램이 예전보다 많아지다 보니 심사나 평가 요청도 받게 된다. 젊은 연구자의 연구계획서를 읽으면서 오히려 내가 영감을 받는 경우가 많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수락하곤 한다. 패기에 찬 젊은 과학자의 계획서를 통해 접한 글로벌 연구 동향을 나중에 세계적인 대가에게서 보충 설명을 듣는 경우도 자주 있다.
얼마 전에 젊은 과학자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한 생물학자와 얘기를 나눌 때였다. 전문적인 연구 내용을 듣다 보니 금방 밑천이 동나서 무슨 말인지 알 도리가 없어서 지도교수님이 누구신지 물었다. 혹시 내가 아는 분이라면 어떤 종류의 주제를 다루는지 어떤 연구 훈련을 받았을지를 대강 추측할 수 있어서 자주 활용하는 응급 대처 방법이다. 그런데 그 젊은 생물학자가 대답하기를 “제 지도교수님은 생명과학 연구를 접으시고 수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셨어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이게 뭔 소린가’ 하는 얼굴이 된 건 당연지사다.
집에 와서 그 문제의 생명과학자 레온 애버리(Leon Avery)를 검색해 보았다. 미 스탠퍼드 대학에서 생화학 박사학위를 받고 텍사스대학 사우스웨스턴 병원과 버지니아 커먼웰스 유니버시티(VCU) 병원에서 교수를 지낸 저명한 생명과학자인 애버리 박사가 2014년에 자신의 페이스북에 ‘나는 왜 과학을 떠나는가’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글을 올려둔 게 나왔다.
그는 40년의 연구자 삶을 돌아보며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때가 학생 시절과 박사후연구원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호기심이 동력이 되던 시절은 사라져 버렸고, 기초 생명과학에 주요 관심을 가진 자신과 같은 연구자에게도 어떤 질병의 치료에 기여할 수 있는 연구인지를 소명해야 연구비를 주는 시스템이 강화되고 있다고 말하며 좌절감을 토로한다. 호기심에 기반한 연구가 과연 남아 있는가에 대한 회의, 과도한 보고서 및 서류 작업과 잡무, 자신의 실험실에 있는 학생들의 미래가 이전보다 훨씬 불확실한 것에 대한 교육자로서의 고뇌 등을 열거한다.
그의 글을 읽다 보니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겪는 어려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회 기여적인 연구의 가치야 두말할 필요 없이 중요하지만, 그 하단에 있는 기초 연구의 가치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문제 제기는 전 세계적인 것이었다. 40년 동안 실험과학자로 지냈고 지난 24년 동안은 자신의 실험실을 운영했던 그는 연구자의 삶을 포기하고 캐나다 워털루대학 수학과 대학원에 학생으로 신규 입학해서 현재 재학 중이다.
고등학교 기하학 시간에 처음 가지게 된 열정을 이제 다시 꺼내서 제대로 추구해 보겠다는 애버리 박사에게 한마디 전하고 싶다. “21세기 수학의 새로운 지평이 생명과학과의 본격적인 만남일 거라는 예상이 확대되고 있어요. 어쩌면 애버리 박사는 그 최전선에 서게 될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