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코(KIKO)는 기업이 은행에 오히려 암보험을 들어준 꼴.”
박선종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23일 이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기업은 키코를 통해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소액밖에 보장이 안되는 (그래서 아무도 들지 않는) 감기보험을 든 꼴이고, 반대로 은행은 소액을 지불하고 암에 대비한 모양새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한진선물과 현대선물 등을 거쳐 BS투자증권(현 BNK투자증권)에서만 11년을 서울본부장(상무)으로 일한 증권맨 출신이다. 현업에서 일하며 고려대에서 법학석사와 박사과정을 밟던 중 우연히 키코 사태와 관련해 금융법학회에 토론자로 초청되면서 관련 연구를 시작했다.
박 교수가 본격적으로 키코 문제 해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키코 수사를 처음 담당한 박성재 전 서울중앙지검 검사의 자문 요청 때문이었다. 박 전 검사에게 의견서를 써주면서 씨티은행 본점 직원과 지점 직원 간 통화내용을 알게 됐고 이들의 대화에서 키코가 사기 상품이라는 점도 처음 인지했다. 이미 2008년 키코 사태가 벌어진 후 2년여가 지난 시점이었다.
박 교수는 “제1금융권 은행들이 고객에게 상품 자체가 사기인 것을 알고 팔았으리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못했다”며“기업들은 이를 꿈에도 모르고 초기에 형사소송이 아닌 민사부터, 그것도 기업별로 따로 진행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박 교수를 비롯해 키코 피해기업과 변호인단은 소송에서 키코 상품의 사기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민사 1심 재판이 은행 쪽으로 기운 상황이었고 검찰은 박 전 검사의 돌발적인 공판부 발령 등으로 수사 의지가 없는 상태였다.
특히 은행 측 변호인인 김&장 등 대형 로펌이 제시한 키코 관련 논리가 판결문에 그대로 반영됐다. ‘키코는 확률이 낮은 구간의 위험을 부담하는 대가로 확률이 높은 구간(녹인-녹아웃)의 행사 환율을 높여 통화 선도 거래에 비해 추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상품’이라는 정의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2010년 11월 키코 1심 판결에 등장한 내용이지만 이보다 앞선 6월 김&장이 자체 제작해 판사들에게 배포한 ‘키코-오해와 진실’ 책자에도 담긴 내용이다.
박 교수는 “법원이 키코가 ‘헤지 상품’인지를 판단할 때 위험의 발생가능성만 중시하고 정작 헤지 대상인 위험의 크기는 무시한 것”이라며 “재판부의 키코 정의 자체부터 틀렸다”고 비판했다. 대법원의 판단을 당사자 지위·계약 목적·헤지 대상 세 부분에서 모두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원래대로라면 옵션 매수인인 기업이 보험으로 치면 계약자가 돼야 하지만 키코에서는 정반대로 보험회사의 역할을 하는 ‘당사자 지위 전도’가 일어났다. 계약 목적 역시 원래는 위험 회피였지만 실제로는 은행의 위험을 인수하게 된 점, 헤지 대상 역시 큰 위험이 아니라 30원 정도의 작은 위험이었던 점 등도 키코가 구조적으로 전복된 상품임을 입증하는 근거로 제시했다.
박 교수는 “재판부 역시 이례적으로 공개변론을 할 만큼 혼란스러운 지점이 많았던 사건임에도 대법원은 소수의견조차 없이 13대0으로 은행에 승기를 쥐어줬다”며 “금융 감독 당국의 재조사는 물론이고 불미스러운 판결에 대해 사법 적폐 진상조사까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