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금융에 대한 무조건적인 대출승인은 비단 국민은행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은행 내부 관계자에 따르면 이 은행도 올해 1월1일부터 이번달 17일까지 신청된 총 기술금융 600여 건 모두에‘T6 이상’ 등급을 매겨 전건 대출 승인을 해준 것으로 알려졌다.
◇“무조건 T6 이상 평가해라”… 평가자들 “몇 등급 필요하냐”묻기도 = 은행들이 기술력 평가를 제대로 하지 않고 날림 심사를 하는 배경에는 실적경쟁이 자리하고 있다. 기술금융 실무를 담당하는 국민은행 기업금융부 평가팀장은 평가위원들에게 “대출이 나가는 T6 이상으로만 등급을 산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은행 한 내부 기술평가위원은 “위선에서 T6 밑으로 등급을 매기면 실적 없는 것으로 하겠다, 무조건 6등급 이상으로 매겨야 내년 재계약이 가능하다고 평가위원들을 압박한다”고 토로했다. 이들 15명 기술평가위원들은 1년 단위로 은행과 계약을 맺는다. 재계약을 맺기 위해서라도 대출 대상인 T6 이상 등급으로 찍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기술평가위원이 영업점에 전화해 “몇 등급이 필요하냐”고 먼저 묻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등급을 낮게 줄 경우 영업점이 본점에 민원을 제기할 것을 감안해 먼저 알아보고 평가를 한다는 설명이다.
내부 관계자에 따르면 국민은행은 기술평가기관(이하 TCB) 6곳에도 T6 이상 등급으로 매겨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기술금융부 본점이 외부 TCB에 연락해, 특정 차주 업체를 지목하며 “이 업체는 영업점에서 요청이 들어왔으니 무조건 T4·T5 등급을 줘야한다”고 요구하는 식이다. 또 국민은행은 외부 TCB가 기술등급을 T6 이상으로 산정해 주는 경우 이를 T5, T4 등으로 한 단계씩 등급을 부당 상향한 것으로 알려졌다. 등급이 올라가면 대출한도가 늘어난다.
◇인문계 출신·비전공자가 업체 기술평가 = 기업의 기술등급을 직접 매기는 기술평가위원들의 비전문성과 인력운영상 문제도 졸속심사의 원인으로 꼽힌다. 지난 3월 국민은행 배모 기술평가위원은 한 레이저가공업체에 대한 기술평가를 실시한 뒤 대출 가능등급인 ‘T5등급’을 매겼다.
하지만 해당 평가위원이 작성한 기술평가서의 ‘핵심기술 경쟁력’항목에는 차주 기업의 핵심기술명만 언급했을 뿐 이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대신 그는 ‘해당 기업이 3층에 위치한 설계 작업실에서 자체 가공 후 도면을 제작한다’, ‘절단된 판재를 용접해 하나의 생산품이 완성된다’는 식의 작업 절차에 대한 설명만 적어놨다.
다른 시중은행 기술금융부 관계자는 “레이저 가공업체는 금속 분야 전문가들이 평가해야 맞다” 고 지적했다. 기술평가위원 자격 요건은 △자연계 박사, 변리사, 기술사 △ 3년 이상 국공립·정부출연 등 공인 연구소 근무자 △2년 이상 외부 TCB 근무자 등이다.
배모 평가위원은 외부 TCB경력 2년으로 자격요건을 충족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공계 전공 교육과 산업체 경력이 전무한 인문계 출신이 기계, 재료 등 전문 기술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지적이 나온다.
전공을 고려하지 않은 기술평가 배당도 문제다. 시중은행들 기술평가위원은 15명 이상이다. 국민은행은 △기계·재료 5명, △전기·전자 5명 △바이오·제약·기타 등 총 15명 평가위원을 두고 있다.
내부 관계자에 따르면 국민은행은 경제학 전공인 A평가위원이 전기·전자업체를, 약학 전공인 B평가위원은 바이오 업체와 떡 제조업체를, 물리학 전공인 C평가위원은 모피나 여성복 등 의류업체의 기술을 평가하고 있다.
결국 기술평가를 제대로 하지 않은 날림 심사는 부실 위험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지적이 나온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지난 9월 기준 전체 은행권 기술신용대출 잔액은 123조9366억 원으로 100조 원을 넘어섰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다른 은행들도 평가위원들과 외부 TCB사들이 알아서 T6 이상으로 등급을 매기는 구조” 라며 “우수한 기술력을 가진 중소기업을 선별해 대출해 주라 것이 기술금융 취지인데 기술 안 보고 신청 들어오는 족족 대출해 주는 것이 과연 정상이냐”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