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씨(辛氏·1367~1382)는 영산(靈山·현재의 경남 창녕군 영산면) 사람인 낭장(郞將) 신사천(辛斯蕆)의 딸이다. 신사천은 만년에 고향에 내려와 퇴거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왜구의 침입이 매우 빈번하였다. 왜구는 경제적 곤궁 등의 이유로 1350년(충정왕 2)부터 공민왕 재위 23년간 115회, 우왕 재위 14년간 378회나 고려를 침략하였다. 경상도나 전라도 해안뿐 아니라 내륙까지도 유린하곤 하였다.
1382년(우왕 8)에도 왜적 50여 명이 말을 타고 영산을 침범하였다. 신사천은 가족을 데리고 멸포(蔑浦, 경남 창녕군 길곡면 낙동강 가에 있는 포구)에 와서 배를 탔는데, 아들 신급열(辛及悅)이 배를 끌었다. 그러나 여름 장마철이라 물살이 거세어 닻줄이 끊어지면서 배가 언덕에 닿았다. 그러자 적이 쫓아와 배에 탄 사람들을 거의 다 죽였다. 신사천 역시 살해당하였다.
적이 딸 신씨를 잡아 배에서 끌어내리니 신씨가 저항하였다. 적이 칼을 뽑아 위협하니 신씨는 “이놈아! 죽일 테면 죽여라! 네놈들은 우리 아버지를 죽였으니 나의 원수다. 죽으면 죽었지 너의 말을 안 듣겠다!”며 소리 질렀다. 그러고는 적의 멱살을 잡고 발로 차서 쓰러뜨리니 적이 노하여 신씨를 죽였다. 당시 신씨의 나이 16세였다. 체복사(體覆使) 조준(趙浚)이 그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고 비석을 세워 정표하였다.
이 이야기는 ‘고려사’ 효우전(孝友傳)에 실려 있다. 즉 신씨의 저항 행위는 아버지를 죽인 데 대한 분노로 발생했다고 보고, 그녀를 효녀로 입전(立傳)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그녀가 영산현의 열녀로 기록되어 있다. 즉 겁탈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죽음으로 몸을 지켰다는 점이 강조된 것이다.
‘고려사’는 1451년(문종 1)에 완성되었고, 그 근거가 되었던 자료들은 고려시대의 자료들이다. 즉 고려시대 내지 조선 초의 관점에서 그녀의 행위는 ‘효행’이었다. 그런데 1481년(성종 12)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서는 그녀의 행위를 ‘열(烈)’로 보고 있다. 겨우 한 세대가 지났을 뿐인데도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강조되면서 여성의 정조에 대한 관념이 한층 강화되었던 것이다.
한편 신씨의 언니는 낭장(郞將) 김우현(金遇賢)의 아내이다. 고려 말에 왜적이 침범하였는데 김우현이 도망쳐 숨었다. 감군(監軍)이 신씨에게 남편이 있는 곳을 묻자 그녀는 “상을 탈 일이라면 가르쳐 주겠지만, 죄를 주려고 묻는 바에야 어찌 차마 그것을 사실대로 말해 죽음을 당하게 하겠는가” 하고는 끝내 말하지 않고 맞아 죽었다. 1415년(태종 15)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현재 경남 창녕군 도천면 도천리 산 133번지에는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83호인 ‘열효신씨지려비석(烈孝辛氏之閭碑石)’이 서 있어 신사천 부녀의 충과 효, 열을 기리고 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