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의 손 편지] “여직도 할아버지 보면 설레네”

입력 2017-10-19 10:43
  • 가장작게

  • 작게

  • 기본

  • 크게

  • 가장크게

우리 집 블루베리 농장 길 건너 파란 대문집엔 최 씨 할머니 내외분이 살고 계신다. 최 씨 할머니는 올해로 일흔여섯, 할아버지는 당신보다 세 살이 많단다. 매달 4자와 9자로 끝나는 날이면 읍내에 5일장이 서는데, 가끔 양손 가득 장을 봐 오시는 내외분과 마주치곤 한다.

늘 대여섯 걸음 뒤에서 할아버지를 따라가시는 할머닌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연방 싱글벙글이다. “아직도 할아버지 사랑하는갑다!” 놀리면 “글씨 말이여, 여직도 할아버지 보면 설레네” 하며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이 일품이다.

할머닌 집안이 어려워 요즘의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마치셨단다. 당신 나이 열여덟에 집안 어른 중매로 깊은 산골에서 올라온 할아버지와 얼굴 한 번 보고 혼례를 올리셨단다. 하얗고 귀티 나는 남편(후보?) 얼굴이 얼마나 맘에 들었던지 집에 돌아와선 히죽히죽 웃음이 떠나질 않았단다.

할머니께선 당신이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다 기울어가던 시집에 논 댓 마지기도 사드렸고, 아들 둘에 딸 셋 낳아 모두 제 짝을 찾아주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신다. 지금 이 나이에도 철철이 복숭아 농장에 봉지 싸러 다니고, 인삼 밭에 풀 뽑으러 가고, 대왕 대추도 따고 주먹만 한 밤도 주울 수 있으니 아쉬울 것 하나 없다는 말씀도 덧붙이신다. “내 한 몸 부지런히 굴리면 자식들 신세 안 지고 끼니 해결할 수 있으니 사는 것이 고맙다” 하시는데, 그 넉넉한 마음이 부럽기만 하다.

자그마한 키에 곱슬곱슬 파마머리를 한 할머니 얼굴에선 늘 편안한 웃음이 묻어나오고, 빨간 장화 신은 발걸음은 언제 보아도 가볍고 경쾌하다. 아끼고 절약하는 것이 몸에 밴 분이, 이웃에 살고 있는 베트남, 중국 며느리부터 우즈벡, 네팔 노동자까지 알뜰살뜰 챙기시는 모습을 보면 그저 존경스러울 뿐이다.

일전에 사회복지학과 교수님으로부터 다소 섬뜩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고령사회야말로 인류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극심한 불평등 사회가 될 것이란 이야기였다. 다만 고령사회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경제적 불평등이나 권력 불평등 대신, 건강 불평등 혹은 노화 속도의 불평등이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리라는 것이다. 건강한 몸에 낙관적 긍정적 마인드를 지닌 어르신들과 병약한 몸에 비관적 부정적 태도를 지닌 어르신들 사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이 나타날 것이란 전망이다.

조지 베일런트 하버드 대학 교수도 70여 년에 걸쳐 진행된 성인발달과정 연구를 토대로 귀가 솔깃한 결과를 소개하고 있다. 인생의 특정 시기까지는 삶의 질을 결정할 때에 금수저냐 흙수저냐 계층적 배경도 중요하고, 인종이나 성별도 무시 못 할 영향을 미치지만, 노년기 이후의 만족스러운 삶을 규정하는 데는 오직 하나의 요인, 바로 삶을 향한 개인의 태도(attitude)만이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돈을 쌓아 놓은들 잃어버린 건강을 살 수는 없는 일이요, 권력이 하늘을 찌른다 한들 행복한 삶이 보장되진 않는다는 말이다. 어쩌면 오늘도 밭에 나가 일할 수 있는 건강한 신체에 “여직도 할아버지 보면 설레는” 할머니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소망하는 “잘 나이 들어감”(ageing well)의 롤모델이 아니겠는지.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추가취재 원해요0

주요 뉴스

  • 긁어 부스럼 만든 발언?…‘티아라 왕따설’ 다시 뜨거워진 이유 [해시태그]
  • 잠자던 내 카드 포인트, ‘어카운트인포’로 쉽게 조회하고 현금화까지 [경제한줌]
  • 단독 "한 번 뗄 때마다 수 백만원 수령 가능" 가짜 용종 보험사기 기승
  • 8만 달러 터치한 비트코인, 연내 '10만 달러'도 넘보나 [Bit코인]
  • 말라가는 국내 증시…개인ㆍ외인 자금 이탈에 속수무책
  • 환자복도 없던 우즈베크에 ‘한국식 병원’ 우뚝…“사람 살리는 병원” [르포]
  • 트럼프 시대 기대감 걷어내니...高환율·관세에 기업들 ‘벌벌’
  • 소문 무성하던 장현식, 4년 52억 원에 LG로…최원태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
  • 오늘의 상승종목

  • 11.11 장종료

실시간 암호화폐 시세

  • 종목
  • 현재가(원)
  • 변동률
    • 비트코인
    • 114,851,000
    • +4.22%
    • 이더리움
    • 4,466,000
    • +0.52%
    • 비트코인 캐시
    • 609,500
    • +2.87%
    • 리플
    • 822
    • +1.11%
    • 솔라나
    • 302,500
    • +6.29%
    • 에이다
    • 827
    • +1.47%
    • 이오스
    • 783
    • +4.96%
    • 트론
    • 231
    • +0.87%
    • 스텔라루멘
    • 154
    • +1.99%
    • 비트코인에스브이
    • 83,700
    • +1.33%
    • 체인링크
    • 19,680
    • -2.28%
    • 샌드박스
    • 409
    • +2.76%
* 24시간 변동률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