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근대개혁’의 명목으로 단발령이 공포되었을 때, 단발이 외세가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근대’임을 감지한 조선 남성들은 “목은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는 전통의 논리로 맞섰다. 한편 스스로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은 개화파 남성들에게 단발은 서구식 부국강병을 통해 조선의 미래를 선도하고자 했던 개화파의 메시지였다.
여성의 단발은 1922년에 은밀히 시작되었다. 강향란(姜香蘭)이라는 전직 기생이 단발을 하고 남자 강습소에 다니다가 ‘발각’되었던 것이다. 1920년대 남성 지식인들은 이 사건에 충격을 받고 조선 여성이 사치와 허영을 좇아 ‘조선의 성질’, ‘여성성’을 버리고 있다고 맹비난을 하였다. 겉멋에 휘둘려 전통을 파괴하고 몰지각하게 근대를 추종하고 있다는 것이다.
1900년 경북 대구에서 태어난 강향란은 한남권번(漢南券番) 소속 기생으로 있다가 어느 청년의 지원으로 배화여학교에 다녔다. 진학을 거듭하며 학업에 매진하던 중 청년과 이별하여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삶의 낙을 잃고 자살 시도도 실패한 끝에 강향란이 얻은 결심은 계속 공부해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학비도 없고 배울 데도 마땅치 않았던 강향란은 스스로 단발을 하고 남장을 한 뒤 1922년 6월부터 남자 강습소를 다녔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여자라는 사실이 들통 났다. 처음 보는 단발 여성을 향한 호기심과 냉기 어린 시선 속에서 강향란은 “여자도 굵게 살자면 남자만 못지않다, 이전의 기생생활을 버리고 남자처럼 살아보고 싶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되돌아온 것은 ‘여성의 남성화는 조선사회를 병들게 한다’는 비난이었다.
이후 강향란은 사회주의 이론에 공명하면서 조선무산자동맹회 등 항일단체 활동에 관계했다. 1923년 4월에는 일본 사회주의 이론가의 서적을 갖고 상하이(上海)행 연락선을 탔다가 경찰의 검문을 받기도 했다. 1926년에는 ‘봉황의 면류관’이라는 영화에 출연했다는 기사도 보였다.
1927년 강향란은 강석자(姜石子 또는 錫子, 石者)라는 이름으로 근우회(槿友會)에서 활동했다. 특히 근우회 경성지회의 설립 준비와 운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간간이 행보를 엿보이던 강향란은 근우회 해체 이후 공식 지면에서 사라진다.
최초의 단발 여성으로서 조선의 전통을 파괴하고 여성성을 버렸다고 비난을 받았지만, 그녀가 단발을 감행하면서 바랐던 것은 배우는 것, 사회활동을 하는 것, 기생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논란에 굴하지 않고 단체 활동에 관계하거나 중국을 오가거나 배우 활동을 하며 살았다. 강향란 이후 단발을 선택하는 여성은 늘어갔다. 이들에게 단발 행위는 전통적인 조선여성의 삶을 넘어 여성이 직접 꾸려가는 새로운 삶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