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에게는 물론이지만 내가 나에게 애교를 피우는 것도 하지 못한다. 소위 자기애(自己愛)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나도 가지고 있지만 내가 나를 대접하지 못하는 일을 그저 소박하다고만 볼 수 없다는 생각이 요즘 든다. 그래서 나의 글까지 늘 습기가 있는 질질 짜는 문체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매사 귀찮아하며 사는 내 몰골이야말로 내가 나에게 애교 없는 무뚝뚝한 삶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은 나이가 들었으니 그렇다 하더라도 젊은 날에도 내 남편은 애교 없는 나에게 불만이 많았다. 남편 친구들은 어쩌다가 잠깐 만나는 나를 애교 있는 여자로 보았는지 남편에게 “시인에다 애교까지 있는 여자를 만났으니 너는 복도 많다”고 부러워했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내 남편이 단골로 하는 말은 “네가 딱 사흘만 데리고 살아 보라”는 것이었다. 너는 나무 막대기를 삶아 먹었느냐고 기분만 잡치면 내게 핏대를 올리며 핀잔을 주었다. 욕심도 많지, 애교씩이나? 나는 당당하게 건조하고 무서운 얼굴로 그 무뚝뚝한 마음까지 없애려는 듯 얼굴을 붉혔다. 그래, 잘 했다. 나는 그 문제만큼은 추호(秋毫)도 미안하지 않다.
하루 일과도 태산 같기만 해서 뭐든 해치우는 식으로 살았던 치욕적인 젊은 시절 자기에게 애교까지 부리며 산다는 것은 과다한 욕심일 것. 남편은 그렇다 치고 나는 왜 즐거움이라는 것을 잊고 살았던 것일까. 그렇게 좋아했던 애교를 원 없이 피워 한 다발 장미로 안겨주었다면 지금 하얗게 뼈로 누워 있을 내 남편에게 나는 네게 원 없이 잘 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을.
그러나 그 남자는 그랬다. 생활비는 조금만 주어도, 집에 와서 성질만 벅벅 부려도, 자주 아내의 자존심을 묵사발을 만들어도, “여보, 여보” 하면서 입가에 관능적인 백치의 미소를 띠며 애교를 부려 주기를 바랐다. 그래, 그렇게 했다면 남편은 찬란한 인생이라고 말했을까.
남편이여, 당신의 삭은 뼈에도 귀가 있다면 들어라. 나는 그 시절 애교 있는 남자가 필요했다. 그 시절 나도 위로받고 싶었어. 우리말에 불행을 아주 적절하게 다스리는 말이 있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인데 이것은 극도의 불행한 경지를 편안하게 위로하는 심리적 면역법으로 생각할 수 있다. 나도 자주 사용하는 말인데 불행한 순간을 행복 쪽으로 이동시키는 지혜로운 동작법이라 생각하고 있다
나에게 애교 있는 남자가 없는 일도, 세상 일이 내 뜻과 늘 다르게 갈 때도 나는 이 불행의 하향정지선(下向停止線)에서 발을 뚝 멈출 수 있었다. 결코 이대로는 살지 않겠다는 운명의 정지선이 내게는 있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응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애교가 아니라 응석이라는 좀 더 따뜻하고 모성적(母性的)인 젖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세상이 온통 회색 불안으로 엉기는 이 순간에도 나에겐 평화에 대한 믿음이 있다. 지금 인류가 바라는 것은 젖냄새 나는 모성적 평화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