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과 분노, 항의 유발자는 MBC 수목 드라마 ‘죽어야 사는 남자’다. 1970년대 중동의 작은 왕국으로 건너가 백작이 된 남자가 한국의 딸 앞에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코믹 드라마다. 히잡을 쓴 아랍 여성의 비키니 차림, 무슬림의 음주 등 드라마 장면부터 이슬람 경전 코란에 발을 갖다 대는 남자 주인공 모습의 드라마 포스터까지 중동 국가와 무슬림의 희화화나 비하적 묘사가 적지 않다.
“‘죽어야 사는 남자’는 가상의 보두안티아국을 배경으로 제작됐으며, 등장인물, 인명, 지역, 지명 등은 픽션입니다. 이와 관련된 방송 내용으로 불편함을 느낀 시청자분들께 사과 말씀드립니다.” 문제가 커지자 제작진이 발표한 사과문이다. 드라마와 사과문에선 이슬람 문화에 대한 배려는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에 대한 존중, 문화 다양성에 대한 인식, 젠더와 인권의 감수성은 찾아볼 수 없다.
‘죽어야 사는 남자’뿐이겠는가.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 영화, 광고, 뉴스 등 수많은 미디어와 대중문화는 아랍인과 무슬림에 대한 왜곡된 재현으로 넘쳐난다. 많은 사람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테러 지원국, 독재와 쿠데타가 빈발하는 정치 후진국, 종교분쟁으로 내전과 전쟁이 일상화한 호전국(好戰國), 여성 인권을 짓밟는 일부다처제의 남성 지배국 등 중동 국가와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 서사(敍事)와 이미지가 범람(氾濫)한다.
에드워드 사이드 전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저서 ‘오리엔탈리즘’에서 TV, 영화, 광고 등 서구 미디어가 아랍인을 테러리스트로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동양 문화의 신비한 부분을 과도하게 재현해 중동 국가와 동양 문화에 야만적, 이국적 특성을 부여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서구 미디어가 중동 국가와 동양 문화에 대한 왜곡된 재현과 부정적 묘사를 통해 인종적, 문화적, 종교적 편견과 차별, 혐오를 유발하거나 정당화한다고 비판했다.
우리 미디어 역시 서구 미디어가 구사한 중동 국가와 이슬람 문화에 대한 부정적 재현 체계(오리엔탈리즘)를 검증이나 비판 없이 수용해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이슬람뿐만 아니라 흑인, 동남아 이주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초래하는 묘사도 서슴지 않고 있다. 문화 다양성 대신 문화 서열화를, 인종에 대한 존중 대신 일부 인종에 대한 차별을, 종교에 대한 이해 대신 특정 종교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고 있다.
미디어의 이 같은 재현 결과는 무섭다.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는 봉사활동에 참여한 흑인 청년에게 “연탄 색깔하고 얼굴 색깔이 똑같다”고 거침없이 말했다. “세계를 분쟁과 혼란으로 몰아넣는 이슬람을 반대하는 서명에 동참합시다”라는 이슬람 혐오를 드러내는 거리 서명이 버젓이 행해진다. 이주 노동자 하면 백인 대학 교수보다 동남아 공장 근로자를 조건반사적으로 먼저 떠올린다. 사람들이 미디어가 재현한 특정 인종과 종교, 국가, 문화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내재화했기 때문이다.
2005년 색명 ‘살색’이 사라졌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살색이라는 용어가 특정 색만이 피부색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고 황인종과 피부색이 다른 사람에 대한 차별행위를 조장한다는 외국인의 시정요구를 인정한 결과다. 국가기술표준원은 인권위의 개선 권고를 수용해 살색을 ‘살구색’으로 변경했다. 12년이 흘렀다. 하지만 드라마와 예능, 영화 등에선 차별의 ‘살색’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언제쯤 우리 미디어에선 차별 없는 ‘살구색’ 사용이 일상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