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개울에서 놀다가 눈병에 걸린 적이 있다. 그럴 때면 할머니께서는 역시 정화수 그릇에 담았던 붉은 밭으로 어린 손자의 눈언저리를 문질러주시곤 했다. 지금까지도 무슨 까닭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고 나면 신통하게도 며칠이 지나지 않아 깨끗하게 나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왜 하필 장독대에서 이런 의식을 치러야 했을까. 장독대는 간장, 된장, 고추장 같은 우리 식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발효식품을 보관하던 신성한 곳이다. 따라서 그 어느 곳보다도 정갈하게 씻고 닦았던 성소(聖所)였던 거다. 장독이 얼마나 많은지에 따라 그 집안 살림이 곤궁한지 넉넉한지 알 수 있었고, 장독을 청결하게 관리했는지 여부로 안주인의 살림 솜씨를 평가하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장맛이 변하면 우환이 생긴다”는 말이 나왔을까.
김치냉장고는커녕 플라스틱 그릇조차 귀했던 시절, 장독은 대부분 옹기였다. 고운 흙이나 돌가루를 구워 만든 자기와 달리, 옹기는 작은 모래 알갱이가 수없이 많이 섞여 있는 거친 흙을 사용한다. 옹기 겉면에는 낙엽이나 풀이 섞인 부엽토를 발라주고 소나무를 태운 잿물을 발라준다.
옹기를 가마 안에서 고열로 굽는 동안 표면에 미세한 숨구멍이 생긴다. 이 구멍 때문에 그릇 안과 밖으로 공기가 통해 안에 담긴 음식물이 잘 익고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었다. 미생물이나 효모가 통과할 수 있고 온도, 습도도 조절된다. 이것이 옹기의 최대 장점인 통기성이다.
옹기를 구울 때 나무가 타면서 발생하는 검댕이 옹기의 안과 밖을 휘감으면서 방부성 물질이 입혀진다. 이 때문에 쌀이나 보리 등을 옹기에 넣어두면 한 해가 지나도 썩지 않고 그대로 보존된다. 옹기는 또 깨어져 사용할 수 없게 되더라도 분해된 뒤 2년이 지나면 자연 상태의 흙으로 돌아간다.
최근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는 ‘소통’이 아닐까 한다. ‘소통의 정치’, ‘소통의 리더십’ 등 많은 사람들이 소통을 말한다. 그만큼 소통이 현 시대의 화두라는 것일 테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소통이 강조될수록 아직 현실은 소통과 거리가 멀다는 의미가 아닐까, 란 생각도 든다. 미디어 기기가 발전하면서 우리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한다.
어찌 보면 지금 시대는 커뮤니케이션 과잉시대라 할 수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발달로 우리는 눈을 떠서 다시 감을 때까지 수없이 다양한 형식과 대상과 내용의 소통을 수행한다. 끊임없이 문자나 음성을 주고받기 위해 휴대전화를 잠시라도 내려놓지 않는 사람, 신문이나 TV 뉴스를 보지 못하면 불안해하는 사람, 라디오와 텔레비전, 인터넷의 이야기들에 푹 빠져 지내는 사람…. 이렇듯 지금 우리는 과잉 커뮤니케이션과 과잉 고백의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소통의 창구는 이렇게 다양한데도 외로움을 호소하는 현대인들이 많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SNS를 통한 소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통’과는 다른 형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소위 소통이라고 하면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에서 나아가 그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다시 말해 상대방의 말 자체에 대한 리액션이 아닌 그 심정에 대한 리액션이 소통의 기본이라는 거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많이 하는 SNS의 경우 일방향적 전달인 경우가 많다. 소통의 창구라기보다 차라리 고백의 창구다. 그것도 화장이 지나친 고백의 창구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고백은 포장되기 쉽다. 그래서인지 SNS 속의 사진과 ‘맨션’에서 진정성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인간 존재론적 측면에서든, 사회에서의 기능적 측면에서든 소통은 우리에게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것이었다. 타자와의 소통은 사회적 존재의 조건이며 결과다. 누군가와 또는 무엇인가와 함께 존재하며 이들과 상호작용하는 것은 사회와 문화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로 인식됐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 확장은 인간의 문명화와 인간 존재, 사상 및 사회의 진보로 사고된다. 그러나 과잉 고백의 현실적 경험은 우리에게 새로운 소통의 철학을 요구하고 있다. ‘진정한 소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SNS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던져진 화두다. 문득 바람과 습도 미생물과 담백하게 소통하는 옹기처럼 소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