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년(순조 9) 조선 사회에서는 여성이 쓴 기념비적인 전문서 한 권이 등장했다. 바로 이빙허각(李憑虛閣·1759~1824)의 ‘규합총서(閨閤叢書)’였다.
규합은 여성이 머무는 거처 또는 여성을 의미하므로 규합총서를 풀이하면 가정학 총서가 된다. 그런데 당시 의식주에 대한 탐구는 여성이기에 갖는 관심이 아니었다. 성리학에서 출발해 실용 학문으로 외연을 넓혀가던 실학자들이 깊이 연구한 대상 중 하나였다.
빙허각의 본관은 전주이며 서울 태생이다. 아버지는 이창수, 어머니는 진주 류씨로 류담의 딸이다. 집안은 아버지 이창수, 숙부 이창의, 오빠 이병정에 이르기까지 고위 벼슬을 지낸 명문가이며 당색을 가리자면 소론(少論)이었다. ‘태교신기(胎敎新記)’를 지은 이사주당(李師朱堂)이 외숙모다.
빙허각은 어릴 때부터 총명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무릎에 앉혀 놓고 ‘시경’이나 ‘소학’을 읽어주면 뜻을 바로 깨쳤다. 커서도 기억력이 뛰어났고 공부를 좋아해 많은 책들을 섭렵했다. 시(詩)나 여러 종류의 글도 잘 지어 주위 사람들로부터 여사(女士)라는 호칭도 받았다.
빙허각은 열다섯 살에 서유본(徐有本·1762~1822)과 혼인했다. 시가(媤家)의 학풍은 금석·물·불·별·달·해·초목 등 객관적 사물을 탐구하는 명물학(名物學)에 뛰어났고 농학에서 눈에 띄는 연구 성과를 내놓았다. 서유본의 할아버지 서명응의 ‘고사신서’, 생부 서호수의 ‘해동농서’, 동생 서유구의 ‘임원경제십육지’가 대표적이다.
빙허각은 혼인 후 시가 학풍에 영향을 받았다. ‘규합총서’의 인용서에 ‘해농농서’가 있고, 또 다른 저서로 동·식물에 관한 내용을 담은 ‘청규박물지(淸閨博物志)’의 존재가 이 점을 잘 말해준다. 또한 남편 서유본은 생원시에 합격한 후 마흔셋에 나간 동몽교관(종9품)이 유일한 벼슬이었다. 더구나 1806년 숙부 서형수가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가면서 집안이 일시에 몰락했다. 빙허각 부부는 집안이 망하고 가산마저 기울자 거처를 오늘날 마포 행정으로 옮겼다.
서유본은 평소 출입을 별로 하지 않고 독서에 몰두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빙허각과 함께 학문을 토론하면서 지우처럼 지냈으며 ‘규합총서’라는 책 이름도 붙여주었다. 빙허각은 슬하에 4남 7녀를 두었는데 8명은 일찍 죽고 아들 1명과 딸 2명만 살아남았다.
‘규합총서’는 음식, 의복, 농사 경영, 가정 의학, 생활 금기 및 재난 방지법 등 다섯 편으로 구성되었다. 여성의 눈으로 조선후기 새로운 학풍인 고증학의 연구 방법을 통해 생활 경제 지식을 한글로 담아냈다. 그래서 남성들이 한자로 쓴 방대한 지식을 일상생활 담당자인 여성들에게 전달했다. 그야말로 실용의 학문을 추구한 것이다. 이 책이 빙허각이 살아 있을 때부터 필사되고, 20세기에 ‘부인필지(夫人必知)’ 등으로 재탄생한 것은 여성 독자들의 뜨거운 성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