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업계 숙원이었던 초대형 투자은행(IB) 육성안이 예상과 달리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새 정부 출범과 맞물리면서 금융당국이 심사를 엄격하게 할 가능성이 제기되자, 증권사의 눈치보기가 극심해 진 탓이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금융당국이 지난달 12일부터 ‘초대형 투자은행(IB) 지정 및 단기금융업 인가’ 신청서류 접수를 받기 시작했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단 1건의 신청도 접수되지 않은 상황이다. 당초 금융당국은 7월에 인가를 내고 9월경 발행어음 업무를 개시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었지만, 현재 상황으로는 아무리 빨라도 9월 말은 돼야 인가가 가능할 전망이다.
◇최대 걸림돌 ‘대주주 자격요건’= 초대형 IB 신청 자격을 갖춘 증권사들(미래에셋대우·NH투자증권·KB증권·한국투자증권·삼성증권)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대주주 자격요건이다. 심사 기준에는 ‘대주주가 건전한 재무상태와 사회적 신용을 갖춰야 한다’고 되어 있을 뿐 구체적인 기준은 온전히 금융감독원의 판단에 달려 있다. 당초 대형 증권사들은 무난한 출범을 예상했지만, 최근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것과 시기를 같이해 추진 작업을 잠시 멈추고, 일제히 내부적 법률 검토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초대형 IB를 준비하는 증권사들은 저마다 결격사유에 걸릴 수 있는 요인이 있어 고민이 많은 상황이다. 제재 이력으로는 미래에셋대우가 가장 불리하다. 우선 지난해 베트남 랜드마크72 빌딩의 자산유동화 증권(ABS) 발행 과정에서 공모를 회피해 규정상 최고 수준의 20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 받은 경력이 있다. 파장도 컸던 터라 정치권에서 ‘미래에셋방지법’이 발의되기도 했다. 여기에 이자를 고객에게 돌려주지 않아 기관경고와 5000만 원의 과태료를, 부당한 골프 접대 등으로 3750만 원의 과태료를 부과받는 등 올 들어서만 수 차례 제재를 받은 점이 뼈 아프다.
다른 후보들 역시 자유롭지 않다. 삼성증권은 최대주주인 삼성생명이 올해 3월 자살보험금 미지급 문제로 기관경고 조치를 받았던 점이 대주주 적격성 부분에서 여파를 미칠 수 있다. 관련법상 최대주주가 최근 1년 간 기관경고를 받으면 대주주 결격사유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한국투자증권은 대주주인 한국금융지주가 설립한 사모펀드 코너스톤의 파산이, KB증권은 옛 현대증권이 불법 자전거래(회사 내부계좌간 거래)로 과태료와 1개월 영업정지 조치를 받은 이력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딱히 대주주 적격성과 관련한 문제가 없는 NH투자증권이 1순위로 초대형 IB로 선정돼 핵심 특혜로 지목되는 발행어음을 가장 빨리 시작하지 않겠냐는 전망도 나온다. 금융당국 한 관계자는 “신규사업 인가 가운데 특히 대주주의 윤리성이나 법률 준수 의지에 대한 검증은 필수”라면서 “초대형 IB와 관련해 단기금융 인가 신청이 들어오면 실무 차원의 논의와 정해진 절차를 거쳐 대주주 적격성을 충족하는지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새 정부 금융정책 방향은 여전히 ‘안갯속’ = 개별 기업들의 리스크가 아니더라도 초대형 IB 출범까지 불확실성은 산재해 있다. 업계에서는 박근혜 정부에서 공을 들였던 초대형 IB 육성 정책 기조를 새 정부가 그대로 이어갈지 여부도 불확실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더구나 이 같은 우려에 답을 해줄 수 있는 주무부처 금융위원회는 새 정부 수장을 맞이하지 못한 상태여서 향후 금융위언장 인선에 따라 정책 방향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다.
이에 일각에서는 지금처럼 초대형 IB 승인이 지연될 경우 자본을 확충한 증권사들의 자기자본 활용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자기자본은 늘어났지만 이를 효과적으로 운용하지 못해 자기자본이익률(ROE)이 크게 감소, 경영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금융당국의 업무적 유연성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점차 힘을 얻고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증권사로서는 정부가 주도한 정책 방향에 맞춰 막대한 자금을 조달해 자기자본을 늘리고 인력과 조직을 만든 것”이라며 “초대형 IB 업무가 오랜 기간 지연되면 해당 증권사뿐 아니라 자본시장 효율성 차원에서도 많은 것을 잃게될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