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안건은 가결 요건인 66.7%를 가까스로 넘긴 69.5%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삼성물산 지분 11.21%를 보유하고 있던 국민연금의 역할이 컸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기구들은 반대를 권고했지만, 국민연금은 찬성표를 던졌다. ‘최순실 게이트’를 수사했던 특검은 이날 찬성표로 국민연금이 최소 1388억 원 상당의 손실을 입었다고 추산했다. 이는 국민연금의 돈이 아니라, 가입자인 국민의 돈이다.
최근 금융투자업계의 주요 이슈가 되고 있는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는 기관투자자들이 이처럼 투자자의 이익에 반하는 선택을 하지 않도록 유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연기금·보험사·자산운용사 등 남의 자산을 관리하고 운용하는 기관투자자들이 ‘수탁자로서 이행해야 할 책임을 담은 모범 규준’이다. 만들어진 지난해 12월 당시에는 외면받았지만,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단번에 화두로 떠올랐다.
스튜어드십 코드 바람이 불면서 바빠진 단체가 있다. 일찍부터 금융투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해 왔던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이다.
아직은 생소한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과 관련해 이 단체의 실무책임자인 이종오 사무국장과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언론의 문의 전화가 많아지고, 국회와 기업의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면서 “짧은 시간 시장의 분위기가 180도 급변했다는 점이 반갑기도 하지만, 진작부터 이랬다면 가습기 살균제 사태나 대우조선해양 회계부정 등을 막을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도 남는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 국장은 최근의 시장 분위기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국내 시장에서 스튜어드십 코드가 취지에 맞게 제 기능을 하려면 몇 가지 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여러 기관투자자가 총합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상태에서 공동으로 의결권 행사를 하기 어렵게 돼 있는 점은 자본시장법 개정을 통해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아울러 그는 한국기업지배구조원(CGS)으로 돼 있는 스튜어드십 코드의 운영 주체도 다시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이 국장과의 일문일답이다.
△몸담고 있는 사회책임투자포럼은 어떤 단체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의 힘이 가장 세다. 착한 자본의 힘으로 기업과 사회를 변화시키자는 뜻으로 우리 단체의 양춘승 상임이사가 2007년 설립했다. 비슷한 시기에 장하성 교수가 공모펀드 방식의 사회책임펀드를 만들기도 해서 설립 초기에는 대중의 관심을 좀 받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는 동안 활동이 많이 위축됐다. 이번 정부가 사회책임투자를 강조하면서 요즘은 꽤 바빠졌다.”
△사회책임투자(社會責任投資)의 개념을 간단히 설명해 달라
“사회책임투자란 간단히 말해 투자 대상 기업의 재무적 요소뿐 아니라 환경, 사회, 지배구조 등 비재무적 요소를 함께 고려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도박회사는 재무 상태가 좋지만, 기업윤리 면에서는 문제가 있다. 무기·담배·주류 회사도 마찬가지이다. 돈은 벌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여러 위험이 있는 곳들이다. 예전에는 ‘월스트리트 룰’이라는 게 있었다. 투자 기업에 문제가 많으면 팔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금융위기로 문제점을 노출했다. 반성한 미국 금융기관들은 적극적으로 투자 기업에 개입해야 그 기업의 장기적인 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 같은 방향은 이제 세계적인 흐름이다.”
△스튜어드십 코드와는 어떤 관계가 있나
“사회책임투자가 투자 원칙의 관점이라면, 스튜어드십 코드는 실제 원칙을 실현하기 위한 일종의 도구이다. 남의 돈으로 투자하는 기관투자자들은 고객의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투자 대상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관투자자들이 이런 결정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만든 지침이다.”
△반대편 시점에서 본다면, 투자자가 기업에 너무 많은 요구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투자 기업으로부터 이윤만 얻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책임투자를 제대로 하지 못해 기업의 가치가 낮아진 경우를 생각해 보면 된다. 남양유업의 경우 이른바 ‘갑질 사건’ 전까지 100만 원이 넘는 주가를 유지했지만, 지금은 몇 년째 주가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동양그룹·대한항공 역시 기관투자자들이 수탁자로서의 책무를 다했다면 사태 확산을 막을 수 있었다고 본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도 해당 기업에 수백억 원을 투자하고 있던 국민연금이 충분한 목소리를 낼 수 있던 사안이었다고 본다.”
△스튜어드십 코드라는 말이 어렵다. 우리 말로는 뭐라고 부르면 되는지
“일부 언론에서는 ‘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지침’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그보다는 ‘수탁자로서의 (주주권) 책임의무 지침’으로 고쳐 쓰는 것이 온당하다. 주주권이란 다양한 요인이 투자 수익에 영향을 미칠 것인지 상시적으로 소통하고 판단하면서 투자처를 건전화하는 모든 과정을 포괄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주주권을 의결권이라고 협소하게 해석해선 안 된다.”
△일반 국민 입장에서도 와닿는 장점이 있나
“고갈 우려에 시달리는 국민연금을 예로 들어 보겠다. 국민연금의 고갈 시기를 늦추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보험료를 올리든지, 수익률을 높이는 것이다. 수익률도 단기가 아닌 장기수익률을 올려야 한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업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또 국내 증시의 지배구조 리스크가 해소되고 주주(株主) 친화 정책이 강화된다면 주로 간접투자를 하는 개인투자자들에게도 긍정적인 방향이다.”
△현재 수준의 스튜어드십 코드로 충분한가
“개선하고 보완해 나가야 할 점이 적지 않다. 국내 스튜어드십 코드에는 외국과 달리 기관투자자끼리 연대하고 협력하기 어렵게 돼 있다. 여러 기관투자자가 총합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상태로 의결권 공동 행사를 결정할 경우 자본시장법에 따라 대량 지분보유 공시 의무, 이른바 ‘5% 룰’을 적용받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러면 기관투자자들의 의결권 행사가 상당히 위축될 수밖에 없다. 현재 금융당국이 유권해석을 통해 적용 기준을 완화하겠다고는 하지만, 결국 자본시장법 개정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경제인단체에서는 스튜어드십 코드가 기업 경영권을 위협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경제단체로서는 감정적으로 반대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구태의연(舊態依然)하다는 생각이다. 경영권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보장의 대상인지는 의문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영권은 끊임없이 도전을 받는 대상이다. 주어진 제도의 테두리 내에서 잘못된 판단에 대한 시장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고, 잘못된 판단이 지속되면 경영권을 부분적으로 뺏길 수 있는 것이다. 온실 속에서 자라도록 보호해 달라는 요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스튜어드십 코드가 잘 운영되기 위해 개선해야 할 점은
“기관투자자들을 점검하고 평가해야 할 운영 주체가 한국기업지배구조원으로 지정된 부분은 애매하다. 우리보다 앞서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영국과 일본은 정부기관에서 지침 이행 여부를 점검하고 평가한다. 반면,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은 연기금 등 기관투자자에 대한 서비스 자문사업을 하는 곳이다. 이들은 평가 대상인 동시에 고객인 셈이어서 이해 상충(相衝)이 생긴다. 스튜어드십 코드의 도입 취지인 시장의 자발성을 살리되 평가의 실효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고민이 필요하다.”
△현재 ‘1호 참여기관’인 JKL파트너스를 비롯해 32개 기관이 연내 스튜어드십 코드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예상했던 정도의 참여 열기인가
“숫자만 보면 제도가 순항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다만 조금 들여다보면 아쉬움이 남는다. 참여 예정 기관투자자 32개사 중 자산운용사는 4곳, 증권사는 1곳뿐이고, 나머지는 사모펀드와 벤처캐피털이다. 대형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들의 참여가 아쉽다. 다만 아직 의사를 밝히지 않은 기관투자자들도 아마 내부적으로는 준비를 했을 것이다. 더 늘어날 것으로 기대해 본다.”
△기관투자자의 대장 격인 국민연금이 아직 참여하지 않았다
“스튜어드십 코드의 정착을 위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국민연금도 결국 스튜어드십 코드를 채택할 것이라고 본다. 그러면 눈치를 보던 다른 기관투자자도 줄줄이 가입할 것이다. 기업들은 내년 주주총회에서 특히 긴장해야 한다. 코드 참여 기관투자자들은 의무를 다했다는 공시를 해야 하는데, 내년에는 시행 첫해인 만큼 시장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다. 바람직한 흐름이다.”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은
기자와 홍보전문가 등을 거쳐 2006년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확산하는 비영리단체 활동에 투신했다. 한국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과 함께 △CDP한국위원회 사무국장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 △대한민국지속가능성대회 심의위원 △사랑받는 기업 정부포상 실무평가위원회 △SR표준화포럼 NGO 분과위원 등을 맡고 있다. 여야 국회의원 모임인 국회사회책임투자정책연구포럼 결성을 주도적으로 지원했으며 각 의원실과의 활발한 업무 협력을 통해 2015년 국민연금법 개정, 2016년 1월 조달법 개정, 2017년 3월 자본시장법 개정(정무위원회 통과) 등의 입법 과정에서도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