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월향(桂月香·?~1592)은 평양 기생이다. 현재 우리에게 다소 낯설지만 남쪽에 논개가 있다면 북쪽에 계월향이 있다고 일컬어지면서 임진왜란의 2대 의기로 손꼽힌다. 만해 한용운이 ‘계월향에게’라는 시까지 남길 정도였으니 어느 시절에는 유명하던 여성임에 틀림없다.
조선 후기 역사가 이긍익(李肯翊)이 지은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실린 계월향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장 중에 용력(勇力)이 뛰어난 사람이 있었다. 계월향이 그에게 잡혀 총애를 받았다. 계월향은 탈출하기 위해 친척을 보고 오겠다고 속인 뒤 성 위에 올라 “우리 오빠 어디 있소?”하고 목 놓아 불렀다. 이때 김응서를 만난 계월향은 “나를 탈출시켜준다면 죽음으로 은혜를 갚겠소” 하니 김응서가 허락한 후 친오빠라 하고 성에 들어갔다.
밤에 계월향은 왜장이 깊이 잠들자 김응서를 장막으로 인도했다. 김응서가 칼을 빼서 왜장을 죽인 후 그 머리를 가지고 뛰쳐나오니 계월향이 뒤를 따랐다. 김응서는 발각되면 둘 다 위험하다고 판단해 계월향을 벤 후 성을 넘었다. 이튿날 새벽 일본군은 장수의 죽음을 알고 사기를 잃었다고 한다.
이 내용 외에는 계월향을 역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 ‘임진록(壬辰錄)’을 비롯한 야사나 구비설화 등으로 전해오면서 다양한 이야기로 탈바꿈되었다. ‘임진록’에서 다시 불러낸 계월향은 어느새 김응서의 애첩으로 바뀌었다. 또 왜장의 수청을 든 계월향을 김응서가 살려둘 수 없다 하여 죽였다거나, 계월향이 자신이 죽어야 김응서의 공이 온전하다면서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이야기 등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계월향의 죽음은 ‘충’으로 변해갔고 김응서와 함께 왜장을 죽인 주체로 거듭났다. 대표적으로 1835년(헌종 1) 평안 감사 정원용이 늙은 기생 죽엽에게서 계월향에 대해 듣고 그 공이 논개 못지않다고 여겨 사당과 비석을 세우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이후 계월향이 평양을 넘어 전국적인 조명을 받은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왜장을 죽이고 자신마저 죽고야마는 비극적 결말이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켰고 당시 민중 정서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1921년 4월 26일자 동아일보에는 평양 의열사에서 계월향에게 제사를 올렸다는 기사가 실렸다. 1928년 일제가 불허한 출판물 목록에는 ‘계월향전’이 들어 있다. 광복 이후에도 계월향은 논개와 마찬가지로 소설이나 영화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1962년에 박종화가 ‘논개와 계월향’이라는 소설로 재탄생시켰고, 1977년에는 임권택 감독이 ‘임진왜란과 계월향’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계월향은 근거지가 ‘평양’이어서 대한민국에서 점차 잊혔다. 오늘날 통일을 지향하는 한국사는 계월향을 우리 사회로 다시 불러내는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