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여성의 이름과 행적을 찾기는 어렵지만, 그중에서도 가야 여성의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가야에서 여성의 행적을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 가야 멸망 무렵 이뇌왕(異腦王)의 왕비가 된 여성이 주목된다. 이 왕비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다양한 사료에 등장하고 있으며, 가야와 신라의 외교 분쟁에 중심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후대 신라와 가야 역사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었다.
가야 이뇌왕비는 가야 출신이 아니었다. ‘삼국사기’에는 이찬(伊飡) 비조부(比助夫)의 여동생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찬 비지배(比枝輩)의 딸, ‘일본서기’에는 신라 왕녀로 소개되어 있다. 이름뿐 아니라 가계도 확실하지 않음을 알 수 없다. 신라의 여성이 가야로 와서 왕비가 된 것은 가야 이뇌왕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신라와 백제 사이에서 압박을 받고 있던 가야는 신라와의 동맹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신라 법흥왕(法興王)이 이뇌왕의 요청을 받아들임으로써 522년(법흥왕 9년) 혼인이 성립되었다.
그런데 이 혼인은 두 나라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복장 문제로 분쟁이 발생했다. 왕비가 가야로 올 때 신라왕은 100여 명의 시종을 함께 보냈다. 가야에서는 이들을 여러 지역에 분산해서 배치했는데, 이들이 신라의 의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아리사등(阿利斯等)은 이들이 가야의 복장을 따르지 않은 것을 보고 분노하여 사자를 보내 돌려보내게 하였다. 법흥왕은 모욕을 받았다며 왕비를 신라로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이뇌왕은 이미 부부가 되었는데 헤어질 수 없다는 것과, 아이가 있다는 점을 들어 거절하였다.
신라 법흥왕은 이 일을 빌미로 장군 이사부(異斯夫)를 가야에 파견했다. 이사부는 지나가는 길에 있는 세 성을 함락시키고, 또 북쪽 변경의 다섯 성을 함락시켰다고 한다. 실상 법흥왕은 처음부터 가야 병합의 속셈으로 이뇌왕의 혼인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혼인 동맹 후 가야 연맹은 점차 와해의 길을 걸어갔다. 562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대가야(大加耶)가 신라에 복속되면서 가야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반면 신라는 혼인동맹 이후 승승장구하였다. 가야를 병합하여 낙동강 유역을 차지했을 뿐 아니라, 이후 한강 유역까지 점유하고 오늘날 함경도 지역까지 진출하였으며, 훗날 삼국 통일의 주역이 되었다.
두 나라의 운명을 바꾼 혼인 동맹의 당사자였던 왕비의 심정과 삶이 어땠는지는 알 길이 없다. 분쟁 이후 왕비가 가야에 남아 있었는지 신라로 돌아갔는지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가야의 월광태자가 이뇌왕과의 사이에 낳은 소생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국 출신 왕비의 소생이 ‘태자’로 불렸다는 점을 보면 가야국에서의 삶이 볼모와 같은 생활을 했던 약소국 출신의 여성 사례와는 다르지 않았을까 한다. 이국 출신이지만 적통 왕비로서의 권위를 누리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