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게펜, 찰리 오드리, 크리스 테일러.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지난 10년간 월가를 주름잡았던 스타 머니매니저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공지능(AI) 기술 개발과 함께 월가에까지 로봇이 침투하면서 이들 스타매니저의 시대도 저물어가고 있다.
28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은 인력 감원과 함께 주식투자 종목 선정에서 컴퓨터 모델에 중점을 둔 주식 사업 개편안을 이날 발표했다.
블랙록의 이번 새 전략은 미국 대형주 투자에서 인간이 시장을 이길 수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번 개편안을 주도한 마크 와이즈먼은 “나중보다 지금 진통을 겪는 것이 더 낫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람들이 방 안에 틀어박혀서 주식을 고르면서 자기 옆에 있는 사람보다 더 영리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과거의 방식은 더는 통하지 않는다”며 “머니매니저들은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다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블랙록이라는 항공모함 안에 있으며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와이즈먼은 캐나다연금위원회(CPPIB) CEO를 역임하고, 지난해 블랙록에 합류했다.
블랙록의 이런 변화는 그동안 경쟁사들에 밀렸던 주식 부문에 활기를 불어넣으려는 가장 극적인 시도라고 WSJ는 평가했다. 블랙록은 현재 총 운용자산이 5조1000억 달러(약 5679조 원)로 사상 최대치로 치솟았다. 그러나 그 중 머니매니저들이 직접 종목을 선정하는 능동형 투자 운용자산은 지난해 12월 말 기준 2751억 달러로, 3년 전의 3173억 달러에서 줄었다.
능동형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다른 자산운용사들도 낮은 투자수익률과 투자자들의 성향 변화에 고전하고 있다. 고객들은 시장 추이를 따르며 낮은 수수료가 장점인 인덱스펀드와 상장지수펀드(ETF) 등 수동형 펀드로 돈을 옮기고 있다. 모닝스타에 따르면 지난해 능동형 주식펀드에서 4230억 달러의 자금이 빠져나갔지만 인덱스펀드에는 3900억 달러가 유입됐다. 블랙록도 수동형 펀드의 대표 격인 상장지수펀드(ETF)가 전체 운용자산의 4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커졌다.
블랙록이 ‘주식 피킹’ 부문에서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변화의 폭은 과거보다 훨씬 크다는 점을 WSJ는 강조했다. 블랙록은 지난 2012년 가장 큰 주식펀드 팀원 일부를 관리 부문으로 옮기고 각 팀의 투자 프로세스를 분석하는 작업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 부문의 부진이 계속되자 칼을 다시 빼든 것이다.
가장 큰 변화는 역시 로봇 투자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이번 개편안으로 블랙록의 53명 ‘주식 피커(Stock Picker)’ 중 7명이 자신의 펀드에서 손을 뗄 것으로 예상된다. 그 밑의 직원 수십 명도 회사를 떠나게 된다. 대신 능동형 주식펀드 운용자산의 약 11%를 차지하는 총 300억 달러의 펀드가 컴퓨터 알고리즘에 기반한 양적분석 등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인간 전문가들이 대차대조표를 들여다보고 특정 종목에 투자할지 결정했다면 이제는 인공위성 사진에 나온 월마트 매장 앞에 주차된 차량 수를 AI가 분석해 주식을 매입하라고 권유할 수 있다.
래리 핑크 블랙록 최고경영자(CEO) 겸 회장은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정보의 민주화로 능동형 투자가 더욱 어려워졌다”며 “우리는 이 분야의 생태계를 변화시켜야 한다. 이는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에 좀 더 의존하게 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핑크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제 인간 포트폴리오 매니저보다 알고리즘과 데이터에 바탕을 둔 시스템적인 투자가 더 영리하다고 믿고 있다고 NYT는 풀이했다. 최근 인터뷰나 콘퍼런스에서 핑크 CEO는 회사 내 스타 머니매니저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실리콘밸리 CEO들처럼 기술에 대화 초점을 맞췄다. 블랙록은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 아니냐는 불안과 관련해 필요에 따라 계속 인력을 고용할 것이기 때문에 즉각적인 감원에도 18개월 이후에는 현재와 직원 수가 비슷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블랙록은 그동안 일부 기관투자자에게만 데이터와 컴퓨터 시스템에 바탕을 둔 주식펀드 투자를 허용했지만 이제는 일반 고객도 이런 펀드를 구매할 수 있게 됐으며 수수료 절감 효과도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