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공덕귀는 호주 선교사의 도움으로 동래 일신여학교에 입학했다. 공부는 물론 피아노와 운동에도 소질이 있었다. YWCA(기독교여자청년회) 학생회의 회장으로 활동했고 교우 관계도 좋았다. 학기 말 시험이 끝나면 해운대로 놀러가서 수영을 하고, 레코드를 틀고 ‘체육댄스’를 추기도 했다.
1936년 동래 일신고등여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뒤 일본 요코하마(橫濱)공립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때 박용길(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을 만나 공부와 신앙생활을 함께했다. 1936년 학교를 졸업하고 김천 황금동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했다. 그러나 교회 설교까지 개입하며 트집을 잡는 일제의 탄압으로 다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43년 일본 동경여자신학전문학교 4학년에 편입해 공부를 했다.
1946년에는 조선신학교(현 한신대) 여자신학부의 전임강사가 되었다. 이때 주변 권유로 당시 서울시장이던 해위(海葦) 윤보선(尹潽善)과 결혼했다. 39세 신부 공덕귀는 신랑의 안국동 집 대청에서 함태영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1960년 4·19혁명으로 야당이던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다. 민주당 구파의 영수 윤보선은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신파의 영수 장면(張勉)은 의원내각제하(下)의 총리가 되었다. 그 뒤 공덕귀의 짧은 경무대(현 청와대) 생활이 시작되었다. ‘혁명정신’을 계승해 참된 민주주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치던 시기였다. 이때 공덕귀는 공식행사 참석 등 영부인으로서 해야 할 일 외에는 눈에 띄는 사회활동은 하지 않았다. 당시를 회고한 글에서는 “경무대 안에 앉아 있는 나는 조롱에 든 새와 같이 소식을 잘 듣지 못했다. 단지 날이면 날마다 학생들의 데모가 계속되고 있다는 해위와 측근들의 걱정소리만 듣고 있었다”고 했다.
공덕귀는 경무대의 안살림을 맡으며 검소한 일상을 보냈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정세가 급변하자, 1962년 3월 22일 윤보선은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그 다음 날 가족들은 경무대를 떠났다.
공덕귀는 다시 야당 정치인이 된 남편을 돕는 한편, 한국 사회 민주화 운동과 여성 인권 운동에 적극 나섰다. 1974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윤보선이 실형을 선고받은 뒤 구속자가족협의회 회장을 맡았으며, 1976년에는 ‘3·1사건 가족대책협의회’ 회장으로 남편의 석방운동을 했다. 1977년에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이 되어 여성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지원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한국 민주화 운동 역사의 한가운데 있었던 공덕귀는 1997년 안국동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