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맨해튼 마천루에 선명한 지문을 남긴 인물’ 록펠러 가의 유일한 3세대 생존자였던 데이비드 록펠러가 20일(현지시간) 향년 101세로 세상을 떠났다.
데이비드 록펠러는 미국 역사상 최고 부자 가문으로 꼽히는 록펠러 가문의 3세대 6남매 중 막내다. 록펠러 가의 시조인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엑손모빌의 전신인 스탠더드 오일을 이끌며 ‘석유왕’으로 불렸다. 그는 1남 4녀를 남겼고, 아들 존 D. 록펠러 2세가 사업을 계승했다. 존 D. 록펠러 2세는 6남매를 낳았다. 6남매 중 넬슨 록펠러는 뉴욕 주지사를, 제41대 미국 부통령을 역임했다. 윈스럽 록펠러는 아칸소 주지사를 역임했다.
6남매의 막내인 데이비드 록펠러는 현 JP모건체이스은행의 전신인 체이스맨해튼은행을 이끌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그가 록펠러가의 3세대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1960~1970년대 체이스맨해튼은행의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였던 그는 많은 사람에게 서구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그는 단순한 은행 CEO가 아니었다. 데이비드 록펠러가 개발도상국을 방문하면 그는 국가 원수와 다름없는 대접을 받았다. 세계 각국 지도자들과 끊임없이 만나며 국제회의에 참여했다. 러시아의 니키타 후르시초프 전 서기장은 1964년 회의에서 만난 데이비드 록펠러를 “그는 40년 동안 200명의 국가 지도자를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회고했다. 루마니아의 마지막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데이비드 록펠러는 매우 매력적인 동시에 가장 강한 지도자 중 한 명”이라고 묘사했다.
강단 있는 리더로 통했던 데이비드 록펠러는 체이스맨해튼은행을 러시아, 중국, 중동지역까지 뻗어나가게 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잘 나가던 록펠러는 1970년 체이스맨해튼은행의 실적 악화로 시련을 맞이한다. 당시 은행은 3900만 달러(약 436억 원)의 채권 거래에서 손실을 봤다. 록펠러는 기민하게 대응했다. 후임인 윌러드 버쳐 CEO가 정상화된 상황에서 경영권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했다. 현재 JP모건체이스의 제이미 다이먼 CEO는 “록펠러는 우리 삶에서 지울 수 없는 긍정적인 표식을 남겼다”며 “경영 활동뿐 아니라 자선사업, 예술, 등 여러 방면에서 선두주자로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업적은 맨해튼 곳곳에 뚜렷하게 남아있다. 그의 아버지인 존 D. 록펠러 주니어가 록펠러 센터를 만들고 형인 존 D. 3세가 링컨센터를 지을 때 그는 원체이스맨하탄플라자를 설립했다. 이 건물은 뉴욕에서 11번째, 미국에서는 43번째로 높은 건물로 알려져 있다. 마천루뿐만이 아니다. 자선사업과 예술에 아낌없는 투자를 했던 선조를 이어 뉴욕의 세계적인 근현대미술관 모마(MOMA)에 작품을 기증하며 현대 미술 발전에 이바지했다. 예술 애호가였던 그는 러시아 출신 추상 화가인 마크 로스코의 ‘화이트 센터’라는 작품을 2007년 5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 내놨다. 이 작품은 7280만 달러에 팔리며 당시 최고 경매가를 기록했다.
데이비드 록펠러를 설명하는 또 다른 수식어는 ‘박애주의자’다. 단순히 이름난 자선사업 가문의 수장이어서가 아니다. 그는 1958~1973년 뉴욕주 주지사를 지냈던 자신의 형 넬슨 록펠러와 세계무역센터(WTC) 설립을 추진했다. 때문에 2001년 9.11테러로 WTC가 무너졌을 당시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데 힘썼다. 그는 사라진 WTC 자리에 거대한 기념물을 만들기보다는 주변 환경과 어울리는 상징물과 유족들에 대한 배려가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TV 인터뷰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최고의 추모는 다시 뉴욕을 번영하는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라며 위로의 연설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