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경(辛義敬, 1897∼1988)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 4인 중 한 사람이다. 1898년 3월 23일 서울에서 아버지 신정우와 어머니 신마리아(본명 김마리아)의 3남 1녀 중 고명딸로 태어났다. 집안은 기독교 가정이었고 어머니는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 교감, 연동교회 최초의 집사, 초대 여전도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터(김점동)는 신의경의 큰이모, 세브란스병원 부속 간호학교 1회 졸업생인 김베세가 작은이모이다.
신의경은 선교사가 세운 정신여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이 학교의 교원으로 있으면서 1919년 김마리아와 함께 비밀결사 조직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서기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동료의 밀고로 조직과 활동이 드러나면서 관련자들이 검거되었고, 2년간의 옥살이를 했다.
출옥 다음 해인 1922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 창설에 참여해 서기로 일했다. 1924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영문학)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도후쿠대학(東北大學) 문과(역사학)를 나왔다. 이 대학의 유일한 여학생이었으며, 이때 미래의 배우자 박동길(朴東吉, 1897∼1983, 지질학자)을 만났다. 대학 졸업 후에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원으로 부임해 역사과목(일본사, 동양사, 서양사)을 가르쳤다.
1931년 결혼하여 육아 가사와 함께 사회활동도 병행했다. 피어선 기념 성경학교의 교사와 부원장, 1937년에는 연동교회 여전도회 회장, 경기노회 여전회 회장 등 교회활동에 열성을 쏟았다. 일제 말기에는 신사참배와 황국신민서사 등 일제 협력 행위를 하지 않기 위해 모든 공직 활동에서 물러나 은둔 생활을 했다.
광복 후 미군정이 1946년 12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장 김규식)을 발족시키자 신의경은 여성의원으로 참여했다. 의원 선서 시 “오늘을 못 보고 일찍 가버린 애국여성동지들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라며 감회에 젖었다. 신의경이 의원이 된 것은 광복 후 활동했던 여성단체들이 여성의 의회 참여를 적극적으로 요구한 결과였다.
YWCA대표 자격으로 의원이 된 신의경은 국가 건설과 여성계몽을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과도입법의원의 보통선거법 심의 과정에서 신의경은 황신덕과 함께 여성할당제, 즉 여성의 의원 참여를 보장하는 ‘특별취급안’ 실시를 주장했으나 관철되지 못했다. 과도입법의원에서 ‘공창제도 폐지령’이 통과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신의경은 이 시기 김규식의 정치노선을 지지하였다. 1947년 대한적십자사(총재 김규식) 창립위원과 집행위원, 민족자주연맹(주석 김규식)의 부녀국장으로 활동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피어선성경학교,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서울여자대학에서 교육 활동과 이사 활동, 그리고 여전도회 활동에 주력했다. 1990년,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